‘反화교정책 극복… 전분야 경제권 장악’

소정현 / 기사승인 : 2017-02-27 16:1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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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획 ‘그랜드 차이나벨트’ (17) 세계속의 화교<동남아시아>

[일요주간=소정현 기자] 본보는 특별기획 일환으로 ‘차이나 벨트’ 코너를 신설하여 중화권 전반의 모든 것을 심층 조망한다. 한중 관계 경제교류는 한층 위력을 발하고 있다. 양국간 교역은 상호 최상위권에 있으며, 중국은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 창설을 통해 글로벌 경제 주축의 핵심 역할론 연착륙에 자신감을 고양시키고 있다.

특히 한중 정상회담에서 합의된 위안화 직거래 시장 개설은 세계 주요통화로서 위상을 확장 심화시킬 것이다. 이에 본보가 홍콩에서 중화권 무역 컨설턴트로 활동 중인 ‘Kstars 그룹 리키장’과 함께 중화권 ‘경제·금융·무역’ 흐름을 심층 리뷰하며 전망 예시하는 기획 스페셜에 독자 제현의 호응과 관심을 부탁드린다.(편집자주)



-아시아 최고의 부호 ‘홍콩 리카싱’ 24개국 투자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식민시대 노동인구 유입

-대만 왕융칭 PVC 왕 친환경 자동차산업에 진출
-인도네시아 최대 화교인사는 린사오량 살림그룹
-말레이시아 설탕왕 궈허녠 ‘샹그릴라’ 호텔 운영

-태국의 셰궈민 중국투자 1호기업 농수산업 일궈
-방콕은행 ‘태국의 천삐천’ 거대 국제금융인 변신

-필리핀 10대 재벌 기업중 7개 화교기업 경제좌우
-캄보디아, 베트남, 미얀마, 방글라데시 점진 증가



● 홍콩! 중국 개방의 최고 견인차 역할


中國 남부 광둥(廣東) 성도 광저우(廣州)에서 북동쪽으로 270km 떨어진 산터우(汕頭)와 차오저우(潮州) 두 도시는 지리적으로 인접하며, 두 지역 모두 차오저우 방언을 쓰기에 한데 묶어 차오저우 지방이라 부른다. 이들 차오저우 사람들은 자신들을 광둥 사람으로 분류하는 데 흔쾌히 동의하지 않는다.


이들은 창의적 문화와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으며, 특히 조직에 충성심과 단합력이 매우 뛰어나다. 또한 해외 화교 거부의 상당수가 차오저우 출신이며, 이들은 해외 화교사회에서 객가(客家) 집단과 함께 핵심 주류를 형성한다.


▲ 전 세계에서 최고의 화상을 꼽으라면 1928년 중국 남부 광둥의 차오저우에서 출생한 홍콩의 리카싱(李嘉誠)이다.
전 세계에서 최고의 화상을 꼽으라면 1928년 중국 남부 광둥의 차오저우에서 출생한 홍콩의 리카싱(李嘉誠)이다. 리카싱은 찻집 사환에서 청콩 플라스틱을 설립한 후 부동산에 진출하여 홍콩 허치슨왐포아(Hutchison whampoa, 和記黃埔)와 청쿵(長江)그룹의 대주주로서 엄청난 부를 축적한 입지전적 인물이다.


리카싱의 부친은 초등학교 교장을 지냈으나 중일전쟁이 발발한 1939년 전란을 피해 홍콩으로 이주했다. 부친은 리자청이 14세 때 사망하자, 장남인 리카싱은 학업을 포기하고 가족을 부양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종전되던 1945년 17세 때인 푼푼이 모은 소액으로 플라스틱 공장을 열었다.


이 회사가 청쿵공업공사로, 리카싱 기업집단의 핵심기업인 청쿵실업의 모태가 된다. 이 회사가 만든 플라스틱제 완구와 생활용품의 수요 급증과 1950년대 후반 유럽에는 플라스틱으로 만든 꽃이 큰 인기를 얻어 수출량이 급증했다. 덕분에 그는 ‘화왕(花王)’이란 별명을 얻는다.


이어 리카싱은 1958년 부동산업에 뛰어들었는데, 1967년 홍콩에서 땅값이 폭락하자 싼값에 대량으로 토지를 매입했다. 1972년 홍콩 주식시장이 호황기를 맞자 청쿵공업공사를 상장하면서 분기점을 맞는다.


이후 복합적 요인에 홍콩경제의 불황으로 부동산이 침체에 빠지자, 리카싱은 본격적 대륙진출에 나선다. 개혁과 개방의 문을 활짝 연 대륙의 최고실력자 덩샤오핑(鄧小平)과 홍콩의 거물기업가 리카싱 밀월은 최상이자 환상의 대결합이었다.


1979년 리자청은 홍콩상하이은행그룹의 허치슨왐포아그룹 주식 22.4%를 획득했고, 1985년엔 영국계 대기업 이화양행이 재정위기에 빠지자 이 기업이 소유한 홍콩전등공사 주식 23%를 확보해 경영에 참여한다. 이어 그는 사업영역을 해외로 확대한다. 1986년 캐나다에 진출하여 허스키석유 주식 과반을 확보하며 경영권을 장악했다.


리카싱은 사업범위를 다각화했고 국제화 측면에서 사업지역을 아시아에서 북미주, 유럽, 호주 등 전 세계로 확장했다. 부동산, 호텔, 컨테이너, 제조 및 소매, 통신, 기초시설건설, 에너지 분야 등 광범위하다. 현재 청쿵실업은 전 세계 24개 국가와 지역에 투자하고 있으며, 고용인원만 8만명에 달한다.

▲ PVC의 왕 왕융칭(王永慶)은 대만의 세계적 거부이자 대표적 화교이다.

● 대만 싱가포르, 언어·문화 일체성 中투자 봇물


대만은 언어와 문화가 비슷한데다 중국 본토에서 넘어온 화교들이 경제권을 장악하고 있기 때문에 중국 투자는 물 흐르듯 자연스럽다.


대만의 기업 가운데 중국에 진출한 기업은 중소기업 위주로 약 5만 개에 이르는 것으로 파악되는데, 재벌들도 사정은 비슷하다. 2002년 중국 투자 액수는 2백21억 달러(27조원)에 이르며,대만의 전체 해외 투자액의 40%에 해당한다.


PVC의 왕 왕융칭(王永慶)은 대만의 세계적 거부이자 대표적 화교이다. 왕융칭은 1999년에만 자산이 미화 58억달러에 달하는 세계적 거부로 자리 잡았다. 대만의 플라스틱 그룹을 관장하고 있는 PVC 원료의 연간 생산량 98만t은 단일품목으로는 세계 최대의 규모다. 이제는 전기자동차의 무한 가능성에 주목하면서 친환경 자동차산업 진출을 시도하고 있다.


1917년 1월18일 타이베이(臺北) 근교에서 출생했으며, 2008년 10월 15일 별세한 왕융칭 집안은 청나라 후반기에 대륙 남부 푸젠(福建)에서 건너와 정착했다. 왕융칭 부친은 조그만 차밭을 가진 빈한한 농민으로, 슬하에 3남 5녀를 두었고 왕융칭이 맏이였다.


초등학교를 겨우 졸업한 왕융칭은 15세에 고향을 떠나 타이완 남부 자이(嘉義)란 도시에서쌀가게 점원으로 취직했다. 이듬해 200달러를 자본으로 자신의 쌀가게를 열었다. 이후 정미소, 벽돌공장, 목재소를 거쳐 1953년 그의 인생을 바꾸어 놓은 타이완 플라스틱 유한공사(臺灣塑膠工業股 有限公司)를 설립했다.


왕융칭은 ‘어려움을 참아내며 노력한다.’는 인생의 좌우명이 자연스럽게 새겨졌다. 고객을 왕으로 모시는 철저한 서비스 정신의 경영, 원가절약과 효율성 추구의 경영, 이론과 실무의 결합을 중시하는 실시구시 경영을 통해 기업의 모범을 보이려고 부단히 노력했다.


다음으로 싱가포르를 알아본다. 중국 본토(홍콩, 마카오 포함)와 대만 이외엔 중국계 화교의 비율이 높은 나라가 싱가포르이다. 싱가포르는 1819년 프랜시스 래플스에 의해 식민지로 개척되었다.

19세기 중반부터 본격적으로 식민지를 개발하면서 노동력 확보를 위해 중국 본토인 청나라로부터 수많은 중국인들을 이민으로 받아들였다. 그 영향으로 현재 싱가포르 전체 인구 중 중국계가 차지하는 비율이 78% 정도에 달한다.


싱가포르에서 중국계는 경제적 실권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막강한 영향력을 갖고 있다. 1956년(당시 자치령 상태) 이후 정부 수반인 총리는 림 유혹, 리콴유(李光耀), 고촉통(吳作棟) 등 줄곧 중국계가 맡아왔다. 그리고 소수계인 말레이인, 인도인에 배려 차원에서 각료직과 국회의원 의석의 일정 부분을 이들 출신에게 할당하고 있다.

▲ 하르토(Suharto) 대통령이 1998년 5월 22일 권좌에서 물러나기 전까지 인도네시아의 최대 화교재벌은 린사오량(林紹良) 살림(Salim)그룹 회장이었다.

● 인도네시아, 식민시대 유입…튼튼한 뿌리


이주국들의 정치적 탄압과 현지인들의 반(反) 화교 폭동 등으로 인해 동남아시아의 화교들은 갖은 고통을 겪어야 했다. 하지만 그런 악조건 속에서도 화교들은 계속 성장해 동남아시아에 뿌리를 내렸다.


인도네시아 인구의 약 4%가 화교이며, 이들 인구는 1000만명 정도로 추정된다. 화교들이 거주하는 대부분 대도시에는 차이나타운이 건설되어 있다. 이들은 주로 자바, 수마트라, 깔리만딴, 술라웨시, 이리안자야 등지에 거주한다. 특히 수마트라의 메단(Medan)시의 150만 명의 인구 중 30%가 화교이다.


인도네시아 100대 부자 중 79%, 10위권 내에서는 1명을 제외한 전원이 화교다. 또한 상장 기업 가운데 화교 기업의 비중은 70% 이상이다.


현재의 화교사회는 네덜란드가 인도네시아를 식민 지배할 당시 성립되었는데, 네덜란드는 값싼 중국인 노동자인 쿨리(苦力)를 수입해 인구가 증가하였고, 또 화교 기업인들을 중개상으로 활용하기 위해 화교 기업인들에게 특권을 줬다. 쿨리는 제2차 세계대전 이전의 중국과 인도의 노동자. 특히 짐꾼·광부 ·인력거꾼 등을 가리켜서 외국인이 부르던 호칭이다.


그러나 인도네시아가 독립하자 그동안 유리하게 작용하던 식민지 정부와의 관계가 오히려 독이 되었다. 인도네시아 정부는 화교에 대해 공식적인 차별 정책을 펼쳐, 거의 모든 화교들이 인도네시아의 시민권을 얻는 것이 불가능해졌으며, 한자와 중국어의 사용도 금지되었다.


또한 1965년 반(反)공산당 작전기간 동안에 수많은 화교가 살해되었다. 하지만 1990년대에 들어 중국과 국교회복을 위해 화교들의 시민권 수속을 완화하는 등 유화 정책을 펼치면서 인도네시아 화교에 대한 대우가 개선되었다.


수하르토(Suharto) 대통령이 1998년 5월 22일 권좌에서 물러나기 전까지 인도네시아의 최대 화교재벌은 린사오량(林紹良) 살림(Salim)그룹 회장이었다. 살림그룹은 아시아 금융위기가 오기 전 계열사가 640여 개에 연간 매출액이 200억달러에 이르는 거대 기업군으로 성장했다.


린사오량은 1916년 푸젠성 하이커우(海口)에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난 이른바 ‘푸젠방’이다. 그리고 아스트랄그룹과 시날마스그룹도 주요 기업군들이다. 아스트라그룹의 중추기업인 아스트라인터내셔널은 1960년 말 경영난에 빠진 국영 트럭 조립공장을 매입한 것을 시발로 자동차산업에 진입했다. 그 후 일본기업과 합병, 자동차와 중기를 중심으로 한 인도네시아 최대기업으로 성장했다.


또한 1952년에 창설된 시날마스그룹은 식용유에서 출발하였고, 1970년대에는 제지업에 참여하여 인도네시아 국가 전체 종이 생산의 30%, 수출의 50%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가운데 은행, 부동산, 호텔 영역까지 사업을 확장하였다.

● 말레이시아, 反화교정책속 지위 대폭 향상


말레이시아는 총인구의 약 29%가 중국계 후손이며, 이들 화교가 말레이의 모든 부의 40%를 점유한다. 말레이시아 행정·경영 부문의 전문인력 중 60%를, 비즈니스와 상업 부문의 70%를, 상장 주식의 61%를 소유하고 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혈연만큼 강한 단결력은 없다. 말레이 반도 북부 페낭(Penang)시에는 구씨, 임씨, 담씨 등 거대한 성씨협회(KONGSI)가 존재한다.


말레이시아는 인도네시아를 비롯한 동남아시아의 많은 나라와 같이 서구 세력에 의해 식민 지배를 받았다. 또한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는 닮은 면이 많다. 反(반)화교 의식이 뿌리 깊게 박혀 있는 나라다. 단순히 소수민족으로서 겪는 어려움이 아니라 정치적, 사회적 억압과 탄압 속에서 치열한 생존 싸움을 벌여야 했다.


말레이시아 화교의 주류는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중반까지 영국 식민지 시대에 주석광산이나 고무농장 노동자 쿨리(苦力)로 왔거나, 아편전쟁 이후에 척박한 중국 현실을 피해 이주해 온 남부 해안지방 중국인들로 구성된다.


독립 후에는 말레이시아인 우대정책인 부미푸트라(抑華扶馬, 억화부마, 화교를 억제하고 말레이시아인들을 지원하는 정책)로 화교들을 억압했다. 말레이시아의 공산당이 유혈폭동을 일으켜 반공을 외치는 세력이 증가하고 따라서 공산당이 정권을 잡은 중국에 반감을 가지게 되어, 1969년에는 대규모 反(반) 중국 폭력사건이 일어났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중국인이 이끄는 말레이시아 공산당이 폭력 혁명을 일으켜 사태가 한층 악화되었다.


그 이후 말레이시아와 중국의 관계는 당시 마하티르(Mahathir) 총리의 1985년 중국방문과 1988년의 말레이시아인의 중국방문 여행규제 해제 등으로 점진 개선되었다. 현재는 양국 간의 외교관계가 완전히 회복돼 상호 투자와 교역이 확대되었다. 이에 말레이시아 화교 집단의 지위도 크게 향상되었다.


말레이시아의 대표적 화교기업인은 궈허녠(郭鶴年)이다. 그는 화교 2세 창업자다. 1923년 말레이시아 조호르바(Johor Baharu)에서 태어났는데, 그의 부친은 푸젠 푸저우(福州) 출신이다.


궈허녠의 그룹은 사탕, 제분, 화학, 시멘트, 해운, 금융, 부동산, 호텔 등 다양한 분야를 포괄하는 복합기업이다. 사탕과 호텔이 중심 업종이며, 사탕은 세계 거래량의 10%, 국내 거래량의 80%를 차지하고 있어 그의 별명은 설탕왕(糖王)이다.


설탕에 이어 손을 댄 것이 밀가루다. 1962년 설립한 밀가루 공장은 1990년대 중반에 생산능력이 20만t을 넘어 국내 수요의 40%를 감당했다.


궈씨 형제그룹이 설탕으로 기초를 다졌다면 지금은 호텔업과 부동산으로 꽃을 피우고 있다. 궈허녠은 싱가포르에 관광호텔이 부족하다는 걸 알고 1967년 5성급 호텔을 지었다. 이어 동남아 주요 도시와 중국 대륙의 주요 도시에 ‘샹그릴라’ 브랜드의 호텔을 지어 운영하고 있다. 현재 전 세계에 모두 29개의 호텔을 소유하고 있다.


궈허녠의 대(對)중국 투자액은 50억달러를 상회한다. 1970년대 말 본거지를 말레이시아에서 홍콩으로 옮겨 지주회사인 가리(嘉里)사를 설립하고, 이 회사를 통해 말레이시아, 홍콩, 싱가포르, 중국의 100개가 넘는 자회사를 관리한다.


말레이시아에서 또 하나의 대표적 연합기업으로는 금융, 부동산 업종에 주력하고 있는 멀티·파파스·홀딩(MPHB)가 있다. 화교계 정당인 중국계의 ‘말레이시아중국인연합(MCA)이 화교기업과 개인으로부터 자금을 모아 1975년에 설립한 MPHB는 부동산, 농장, 해운, 금융 등에 진출하였고, 1980년대 초반 말레이시아 최대의 화교기업이 되었다. 당시 이 그룹의 직·간접 화교주주는 11만명 이상이었다. 이외에 복합기업인 혼리욘 말레이시아, 말레이시아 유인온 인더스트리(제조업, 금융) 등이 대표적 화교기업이다.


● 태국문화와 조화 이뤄…중국계 다수


태국의 화교들은 태국인들과 가정을 이룬 중국계 태국인이 다수이다. 태국 내 중국인들은 과거에 중국의 차(茶), 실크, 자기류 등을 무역하던 뱃사람들과 해양 상인들이었다. 이들이 태국에 정착해 살면서 태국 문화와 잘 조화를 이루면서 그들만의 문화 또한 잘 보존해오고 있다.


태국 전체 인구의 9% 정도인 이곳의 화교는 경제의 모든 부문에서 강세를 보인다. 태국에서 기업그룹 중 제1위인 왕실재산관리국 소유의 ‘사이암 시멘트’를 제외한 나머지 그룹은 모두 화교 관할하의 기업이다.


태국에서는 상업 및 제조업의 총자본 중 약 90%, 방적업의 약 60%, 철강업의 약 70%, 제당업의 약 60%, 운수업의 약 70%, 상업의 약 80%를 모두 화교자본이 차지하고 있다.


태국의 셰궈민(謝國民)은 홍콩의 리카싱(李嘉誠), 말레이시아의 궈허녠(郭鶴年)과 더불어 중국에 많이 투자하는 화상(華商)으로 손꼽힌다.


셰궈민은 태국 최대 기업이자 화교 기업인 정다그룹(正大集團) 총수이다. 정다그룹은 양돈, 양계, 어류양식, 사료 등 농수산업 관련 분야에서 세계적 규모와 경쟁력을 갖추었다. 현재 정다그룹의 투자분야는 농수산업, 자동차부품, 석유화학, 시멘트, 인프라 분야 등으로 다각화를 이루었다.


중국의 개혁개방 선언 후 셰궈민은 1980년 1천만달러 들여 광둥(廣東)의 선전(深圳) 경제특구와 산터우(汕頭) 특구에 미국 기업과 합작으로 사료공장과 대형 양계장을 건립했다. 이때 셰궈민의 손엔 중국 정부가 준 ‘001호 영업허가증’이 들려 있었다. 셰궈민는 이를 훈장이라도 되는 듯 자랑스럽게 여겼다.


다음으로, 태국에서 자수성가한 화교는 금융 일가를 이룬 천삐천(陳弼臣)이다. 태국의 유수 금융인으로 성장하는 데 결정적인 것은 태국내 화교의 절대 다수를 차지할 뿐만 아니라 동남아 각국에 있는 차오저우인의 네트워크를 적절히 활용했다는 점에 있다.


1913년 중국 남부 차오저우(潮州) 지방 출신인 부친과 태국인 모친 사이에서 출생한 천삐천은 5세 때 방콕에서 차오저우의 항구도시인 산터우(汕頭)로 보내져 어린 시절을 홀로 보냈다. 빈곤한 가정형편으로 중학교를 채 마치지 못하고 17세에 다시 방콕으로 돌아와 생업전선에 뛰어들었다. 초기 막노동, 주방일, 상점 점원, 목재상 경리, 건축회사 경리 등을 전전하면서 저축한 소규모 자본으로 목재, 철물, 통조림식품, 미곡 등을 취급하는 아주무역(亞洲貿易)이란 회사를 설립하면서 빠르게 사업을 확장시켜 갔다.


이후 천삐천은 서구적인 금융기법을 받아들이는 한편, 전통적인 화교사회의 인적 네트워크를 동시에 활용하는 전략으로 오늘날 동아시아의 거대한 금융왕 건설에 성공했다.


천삐천의 초기 방콕은행은 자본금 미화 16만달러, 직원 23명에 불과한 소규모였으나, 1970년대에 들어 태국 최대 은행으로 자리했다. 국내의 240여개 지점과 함께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홍콩 인도네시아 등의 동남아지역은 물론이고, 일본 미국 영국 독일 등지 40여개의 지점에 2만여명의 직원을 거느리는 거대 국제금융자본으로 대변신을 이루었다.


태국의 최대부호인 천삐천이 1998년 사망한 이후 홍콩 및 해외투자부문, 방콕은행 등 태국의 금융업을 자녀들이 역할 분담을 맡아 운영하는데, 천삐천 집안이 소유하고 있거나 지분참여 형태로 있는 기업은 150개를 상회하고 있다.


1984년 포브스지는 그를 세계 12위의 금융가로 랭크하면서 ‘자수성가한 화교의 전형적 인물 중 하나’로 높이 평가했다. 현재 방콕은행은 진씨 가족의 최대 자산이 되고 있으며, 이들이 직간접 보유하고 있는 지분은 50%를 상회한다.

● 필리핀, 사회적 경제적 위치 최상위권


필리핀과 중국 간의 역사는 매우 오랜 편이다. 명나라 제3대 황제인 영락제(永樂帝, 재위 1402∼1424) 때 필리핀 사절단이 중국을 방문한 기념비가 아직까지 남아 있다. 필리핀에는 이미 그 당시부터 화교들이 거주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필리핀에서 화교가 본격 급증하게 된 것은 다른 동남아시아의 많은 나라들이 그랬듯이 식민지 시절 값싼 노동력을 충당하기 위해 쿨리(苦力)들을 반강제적 유입시키면서 부터이다.


스페인은 화교들을 필리핀인들보다 하층으로 간주하였기에 당시 필리핀 화교들은 경제적 하층민의 생활을 면할 길이 없었다. 이후 미국이 필리핀을 통치하면서 화교들의 사회적, 경제적 지위가 향상되었다.


중국이 개방화 정책을 표방한 1970년대 후반 화교와 중국인 혼혈들의 활약이 두드러지면서 현재에는 필리핀 경제를 좌지우지하는 위치에 도달해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99년에 조사된 필리핀 화교의 인구의 공식 통계는 106만명이다. 필리핀에서 화교들의 인구는 소수에 불과하지만 이들은 막강한 자본력을 소유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세계의 흐름에 대처하는 능력도 뛰어나다.


최근에는 대만, 홍콩, 중국 대륙 등지에서 투자를 목적으로 필리핀에 이주하는 화교들도 점차 늘고 있다. 이들 투자자들과 그 가족들, 관련 기술자, 경영 관리인들은 필리핀에서 거류증을 얻어 생활하고 있다. 이에 화교들 중에서 서민층은 거의 없다고 보는 게 일반적이다.


또한 정치권의 30% 정도, 경제권의 60% 정도를 화교들이 장악한 것으로 파악된다. 필리핀의 초대 대통령인 에밀리오 아기날도(Emilio Aguinaldo)도 중국계 2세이고, 전 필리핀 대통령인 코라손 아키노(Corazon Aquino)는 중국계 3세이다.


중국 이민자들 중에서 특히 푸젠(福健)성 샤먼(廈門) 지역 출신이 강력한 결속력으로 필리핀의 상류층으로 올라섰다. 필리핀의 10위권 재벌 기업 중 7개가 화교 기업이다. 15개 최상위층 가문들이 필리핀 사유지의 절반 이상을 소유하고 있다.


2012년 포브스가 선정한 세계의 억만장자 부호들 중에 필리핀 사람들이 6명 포함되었는데, 그 중 4명이 화교이고 1명은 중국·스페인 혼혈, 나머지 1명은 미국계이다. 이들 화교의 1위에서 3위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1924년 푸젠성 샤먼 출생의 헨리(Henry sy)는 어려서 부친과 함께 필리핀에 이민 온 후 1958년부터 조그마한 신발가게로 시작하여 필리핀 최대 쇼핑몰체인 ‘SM Mall’을 일궜다.


다음으로 루시오(Lucio tan)는 1934년 푸젠성 샤먼에서 태어나 어려서 이민 온 후 1966년 조그마한 담배 가게로부터 시작하여 거부가 되었다. 필리핀 항공을 소유하고 있으며, 1970년대에 마르코스 전 대통령의 최측근 중 한 사람이었다.


그 다음으로 꼽히는 이가 앤드류(Andrew tan)은 20대 초반에 필리핀으로 건너와서 대학 졸업 후 도매업으로 사업을 시작하여 부동산 개발업으로 크게 성공하였다.

● ‘캄보디아 베트남 미얀마’ 날로 증가세


캄보디아 경제를 흔드는 사람들 역시 단연 화교들이다. 이를 입증이라도 하듯 캄보디아 5대 그룹 총수 가운데 4명이 중국계이다. 특히 제조업에서부터 고무나무 재배, 대단위 과일농장까지 전 부문에 걸쳐 캄보디아를 잠식하고 있다.


여기에다 최근에는 화상들의 막강한 자본력을 바탕으로 토지와 빌딩을 사들이고, 주택 건설업까지 진출하며 사업을 확장하고 있다. 이제 중국계 화교집단은 캄보디아 경제에서 직간접으로 차지하는 80%에 육박할 정도로 매섭게 성장했다.


그리고 이미 베트남, 미얀마 등의 나라에서는 화교들의 투자가 이루어지고 있어 사회적 경제적 비중이 점차 높아지고 있다.


총괄적으로 살펴보았듯이 화교들은 아시아의 거의 모든 나라에 진출하고 있다. 화교의 이동사를 보면 주로 해상을 통한 진출이 주종이다. 그러나 인도, 미얀마, 파키스탄, 방글라데시 등의 경우에는 육로를 통해 진출을 한 경우이다.


티베트에 인접한 인도와, 윈난성(雲南省)에 인접한 미얀마의 경우 출국 제한이 완화되자 국경을 이동하는 중국인들이 증가하고 있다. 이들은 싱가포르나 인도네시아 등의 화교들과 같이 눈부신 성장을 이룬 것은 아니지만 파키스탄과 방글라데시 역시 인도 화교 출신이 날로 늘어가는 추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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