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을 뛰어넘어라

안성자 작가 / 기사승인 : 2009-05-22 18:25: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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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과 사탄은 피하면 안 된다. 있는 자리에서 끝까지 이겨내야 한다. ‘삶은 줄넘기와 같다’는 말처럼 사건이 다가오는 대로 뛰어넘으면 된다. 고통은 당함으로만 해결할 수 있다. 피한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피하면 다음에 또 찾아온다. 다만 고통을 생명으로 탈바꿈시킬 수 있어야 한다.

인간은 태어날 때 누구나 모순으로 태어나므로 그 모순의 양은 사람마다 다르다. 모두 모순의 해결을 받아야 하는데, 삶 속에서 고통과 귀신의 양이 차이가 나는 것은 삶의 자세가 다르기 때문이다. 당장은 고통과 귀신의 양이 많을지라도 본인의 진실 여하에 따라 생명의 대열에 끼일 가능성이 높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고통을 단순한 고통으로 마감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렇게 만드는 주범은 은사적인 접근이다.

당함은 정직함이다. 아무나 당하는 기회가 찾아오지 않는다. 생명을 전제로 한 당함을 뜻한다. 참 뜻을 알지 못하면 끝까지 견딜 수 없으며 당함의 유익을 누리지 못한다. 은사가 발달하거나 머리가 잘 돌아가는 융통성이 있는 사람들은 중간에 도망 가버린다. 너무 힘이 들어서 그러겠지만 처음부터 진실이 없었기 때문에 끝까지 갈 수 없게 된다. 진실한 자세에서 당하는 것만이 참의 가능성을 지닌다. 나의 모순을 인정하고 수용하면 된다.

고통 없이 잘 살아가는 사람들이 부러움의 대상이다. 어떤 사람은 망신을 당하지만 어떤 사람은 망신 없이도 잘 살아간다. 당하지 않는 사람들은 머리가 좋다느니 복이 많아 그렇다고들 한다. 고통의 참 의미를 몰랐을 때는 왜 나만 이럴까 하는 생각을 할 수 있다. 그렇지만 모든 것을 알고 나면 당함처럼 좋은 것이 없다. 좋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길은 분명 끝이 좋다. 반면 좋아 보이는 길은 분명 끝이 나쁘다. 그것이 인간의 눈과 하나님의 눈의 차이다.

지금까지는 당함을 당함으로 마감했으므로 끝이 없었지만 이젠 그렇지 않다. 당함의 끝이 오고 있으며 그 당함 때문에 생명이 쌓여 오히려 역습을 가하는 상태가 오고 있다. 이 세상의 당함 앞에 정직하게 대응하면서 생명을 만들어 온 자가 분명 있을 것이다. 필자도 영성을 시작하여 당함이 시작될 때 처음엔 너무 아프고 어안이 벙벙했다.

처음엔 하나님께 기도만 하면 다 해주실 것이므로 어떤 일이 생겨도 나와는 상관이 없다고 믿었다. 갑자기 큰일이 생겨도 착오가 생겨 나에게 잘못 찾아온 줄 알고 다른 곳으로 보내려고 했는데 알고 보니 나와 상관된 나의 고통이었다. 그런 줄도 모르고 피해보려고도 했지만 망신까지 당하게 되었다.

사사건건 그냥 넘어가는 것이 없었다. 얼마나 아팠는지 모른다. 아무도 같이 아파해줄 사람도 없었다. 모두에게 바보 같다고 손가락질을 당했다. 하루도 편할 날이 없었다. 당하는 현상이 한번 기류를 타면 우후죽순처럼 생겨난다. 사건들이 문전성시를 이룬다. 갈기갈기 찢어버리신다. 너무 기가 막혀 눈물도 외마디도 어디론가 사라져버린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그 당함의 진면목을 알게 되었다. 당함의 양이 어느 정도 채워져 분별력이 생기고 분명한 이유를 알게 되니 그때부터는 당함이 수월해지기 시작했다. 당함 앞에 배짱도 생겨난다. 너무나 당해서 찢기다 보면 당함에 대한 감각이 없어지고 대신 허탈한 웃음만 나온다. 스스로 나의 약점을 다른 사람들에게 고백하기도 한다. 망신 앞에 자진출두도 한다. 그리하면 자진출두의 묘미도 맛보고 속도가 조금 빨라진다. 그래서 자진 신고도 한다.

한때는 당함과 친한 친구가 되기도 했다. 기왕 당할 바에야 당함의 양을 빨리 채우자는 생각에 발 벗고 나서는 경우도 있었다. 당함을 기다린 적도 있었다. 어차피 끝까지 가야 하는 것을 알기에 스스로 망신거리를 찾아 공개 처형하는 경우도 있었다. 계속 찢기다 보면 더 이상 찢길 게 없어진다는 사실을 알기에 될수록 빨리 찢기려 해보았다. 나중엔 자원해서 등 뒤에 주홍 글씨를 새기고 다니는 기분이 들었다.

이처럼 일반적인 삶이 아닌 본격적인 하나님의 생명 진입을 위한 간섭이 시작된 것이 어언 15년이 되었다. 한 인간 속에 그렇게 많은 당함의 재료가 숨어 있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사실이다. 실제로 찢겨보지 않았으면서도 다 찢긴 사람처럼 가장하는 이들도 많지만 어디까지나 사실만이 참이라 부를 수 있다.

처음 당함의 양이 적지만 갈수록 증대되고 고지까지는 극치의 당함을 겪게 되며 그 시기가 지나면 점점 조금씩 양이 줄어든다. 시간이 갈수록 당함의 현상이 없어지는 것을 알게 되고 이제 반대로 승리의 쾌거만 들리게 된다. 그리고 갈수록 더욱 자주 승리의 쾌거를 올리게 된다. 세상에 넘지 못할 산은 아무 것도 없다. 이 세상은 유한하므로 언젠가는 끝날 날이 있다. 이 우주의 털끝만 한 것에서도 자유로워질 때, 이 우주를 뛰어넘을 때에야 사탄도 동작을 멈출 것이다.

고통처럼 몸에 좋은 보약이 없다. 사탄은 고통을 배달하는 배달부다. 다시 말해 보약을 가져다주는 심부름꾼이다. 사탄은 우리를 괴롭고 힘들게 하기를 원했지만 결국 우리에게 유익을 남겨준다. 그것들이 하나님의 참 사랑인 줄 아무도 몰랐다. 모순투성이인 나를 하나님의 차원으로 만들어주시려고 그리하시는 것을 안다면 기뻐서 몸 둘 바를 몰라야 할 것이다. 사랑하는 자식에게 매를 주시는 것도 모르고 천방지축으로 날뛰는 군상들을 어떻게든 사람을 만들어보려고 이 모양 저 모양으로 다그치시는 하나님. 하나님께서는 각자의 분량대로 고통을 허락하시고 끝까지 추격하신다.

언제까지나 어린아이로 있을 수 없다. 이제 자식이 성인이 되어 부모님을 도와드려야 한다. 고통의 세월이 길어질수록 큰 생명이 만들어진다. 만약 그 사실을 모두가 안다면 스스로 고통 속에 들어가 처리받기를 갈망할 것이다. 고통이 어느 정도로 유익한지 감히 설명하기 어렵다. 이 세상에서 부정적인 요인의 단어들은 보이지 않는 가치로 본다면 오히려 아름다운 보석을 만들어주는 보이지 않는 손이다.

이 세상 살아가는 동안 고통의 종류대로 다 체험할 수 있다면 그것은 생명생성의 절호의 기회다. 다만 거기서 빠져나온다는 전제로 말이다. 정신을 놓지 않고 끝까지 진실을 놓지 않으면 가능하다. 고통은 우연이 아니다. 모든 요인이 나 자신에게 있다. 하나님의 기준에서 멀어진 만큼 고통의 크기도 커진다.

우리는 그 간격을 좁히기 위해 오늘도 이렇게 열심히 살아가고 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이시다. 기준도 발생도 하나님으로부터 제공받는다. 실마리가 꼬여 있으면 원점으로 다시 돌아가야 하듯 인간도 하나님으로, 근원이신 하나님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런데 자꾸만 더 멀리 떨어져 나가고 있는 실정이다. 자꾸만 다른 쪽에서 해결점을 찾기에 오류에 오류가 더해진다.

오히려 지식의 팽배, 부질없는 연구, 학문. 오히려 그러한 것들 때문에 혼돈만 가중되고 근원으로 회귀하기가 더 어려워진다. 하나님 없이 인간들 힘으로 해결하려는 인간들의 무지와 오만함이 최고점에 다다랐다. 인간들은 하나님의 기준을 회복하는 방법을 모른다. 분별 능력이 감퇴되었기 때문이다. 너무 부질없는 것으로 가득 채워졌기에 너무 혼탁해 분별 능력이 점점 퇴화되어 못쓰게 되어버렸다. 그렇다면 못쓰게 된 기능 회복을 서둘러 되찾아야 한다.

우선 육체에 쌓인 지식들을 없애는 일을 해야 한다. 이미 처음부터 더러움에서 시작했으니 다시 퍼내고 깨끗한 물을 채워 넣기란 무척 어려운 일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고통을 통하여 더러워진 것들을 해결해주신다.하나의 고통을 통과할 때마다 하나의 분별 기능이 회복된다. 가끔 오랫동안 병마에 시달린 사람들이 너무 깨끗한 모습을 하고 있는 경우가 있다. 너무나 쓰라린 아픔 때문에 모든 것을 비워버리고 놔버렸기에,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의 덧없음을 깨달았기에 그들의 얼굴에서 깨끗함을 볼 수 있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모두가 부질없는 지식에 중독되어 있고 남녀노소 누구든지 지식을 탐하고 있다. 지식은 실천하기 위한 것이어야 되는데 스스로 고차원의 학을 만들어 실생활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지식들이 난무한다. 그것 또한 인간에서 출발한 것이기에 지식이 높아질수록 실천과는 멀어진다. 하나님만이 우리가 고쳐야 할 부분을 아시고 고치실 수 있다. 생명은 온전함이요, 어떤 부분에서도 결핍을 찾을 수 없다. 그러기에 우리의 취약한 부분은 생명 앞에 여지없이 노출이 되며 난도질을 당하게 된다.

아무것도 모르는 인간들은 부질없는 것으로 너무 바쁘다. 지금 세상은 눈에 보이는 현상을 최고로 친다. 물질이나 권력은 부분적인 자유함으로 현재는 누릴지라도 참이 아니기에 언젠가는 어떤 부분에서든 오류가 나타날 때가 반드시 찾아오고야 만다. 지금은 너무 높은 권력과 평생을 쓰고도 남을 물질 때문에 자신의 분별력에 만족하며 지금까지 그런대로 잘해왔다고 자만심에 차 있을지라도 그것이 참이 아니기에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른다. 언제라도 잘못된 분별 때문에 사고가 생길 수 있다. 또 그렇게 살다가 생을 마감해버리면 영원히 후회하는 일이 될 것이다.

이 세상의 재료를 이용하여 참 인간이 되라고 했더니 너무나 근시안적인 사고로 대응했다. 누리고 하고 싶은 것 다 하고 끝을 보겠다는 태도를 취했다. 하나님이 자기를 참 인간으로 만들어보시려고 무수한 신호를 보냈지만 외면해버렸다. 가족을 통하여 사람이 되라고 하락하였더니 살을 부비며 내 가족 자식 일이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들이 이 우주에 너무 많다.

하나님은 고통으로만이 참 인간이 되는 사실을 아시고 인간을 고통 속으로 집어넣으신다. 그것도 아무나 주시지 않는다. 사랑하는 자식, 가능성이 보이는 자식에게 주신다. 그것은 받는 사람의 진실 여부에 따라 결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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