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인권에 깊은 관심…법학교수 방송기자 출신”

소정현 / 기사승인 : 2010-04-27 19:1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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女性 국회의원 포커스(3)-‘자유선진당 박선영의원’
▲ 자유선진당 박선영 의원

명쾌한 논리 설득력 겸비 최장수 여성대변인
군사정권 시절 방송기자 民主化에 깊은 성찰
사형제 폐지 한글날 공휴일 지정 목소리높여

[일요주간= 소정현 기자] 자유선진당 박선영 대변인(외교통상통일위)이 지난 2월 10일로 최장수 여성대변인 자리에 등극했다. 2008년 4월 16일 대변인의 부름을 받은 이후 666일을 개근하여 한나라당 조윤선 대변인(665일)의 최고기록을 갈아치운 것.


자유선진당 박선영 대변인(외교통상통일위)이 지난 2월 10일로 최장수 여성대변인 자리에 등극했다. 2008년 4월 16일 대변인의 부름을 받은 이후 666일을 개근하여 한나라당 조윤선 대변인(665일)의 최고기록을 갈아치운 것.

선진당 박선영 대변인은 방송기자 출신에 헌법교수라는 이중 축복으로 절제미와 차분한 목소리, 명확한 발음에 논리정연한 촌철살인 논평으로 신생 군소정당의 억척 살림꾼로서 그 소임을 충실히 다해왔다는 것에 일단 후한 점수를 받고 있다. 특히 상임위와 대정부 질문에서는 아직 여름철이 아닌데도 송곳 질의와 집요한 추궁으로 총리와 장관들의 진땀을 빼기로 악명이 높다.

▼ 군사정권시절 방송기자로 사회 첫발
12년 동안 MBC보도국 기자 활동을 하면서 수없이 기사를 쓰고 마이크를 잡아오다 동국대 교수로 재임 중 여의도에 전격 입성한 박선영의원(54)의 정계 진출은 어떠한 배경을 이루고 있는 것일까? 박의원의 인생 역정은 과연 어떠한 코스를 밟아왔는지 여기에는 숙연함과 녹록함이 동시에 감지된다.


박의원은 이렇게 말한다. “자유선진당 이회창 총재 측으로부터 제의를 받고 학기 중이라 힘들 것 같다. 준비가 안 될 것 같다고 거절을 하다가 갑자기 하게 됐다.” 비례대표의원으로 전국구 3번으로 당선된 박선영의원은 금배지를 차자마자 초선에도 불구하고 곧바로 당의 대변인 역할을 떠맡았다.


3녀 중 장녀로 태어난 박선영의원! 그녀는 어릴 때부터 허약했다. 유아 사망률이 높았던 그 시절, 부모님은 박의원의 출생신고를 미루었다. 박의원은 원래 1955년 12월 31일생이지만 호적상으로는 1956년 4월 6일이다. 초등학생 시절에도 박의원은 잔병치레를 많이 했다.


강원도 춘천에서 학창시절을 보낸 박의원! 자신의 표현을 빌리자면 '투사' 기질이 상당했는데, 9살 때 돌아가신 부친의 영향이 컸다. 또한 박의원은 어린 시절부터 어머니와 여동생들을 보호해야한다는 의무감에 투철했다. 특히 어머니의 교육열은 대단했다. 어려운 살림에도 박의원 본인에게는 피아노와 발레, 둘째와 셋째는 바이올린 레슨을 받게 했다.


박의원의 이름에 얽힌 사연은 흥미롭다. 원래 이름은 박연희. 부친이 작고하자 모친은 친정 쪽으로 이사를 갔다. 그때 동사무소 직원이 '박운희'라고 이름을 잘못 기재했다. 개명을 하기에는 그럴 여력이 없었다. 박선영의원은 기자시절 개명을 성취한다. 이런 사연이 전해진다. 서울역에 취재를 나갔다가 TV의 편집화면을 모니터링 하면서 사람들이 '바구니'라고 놀리는 모습을 보게 됐다. 그때 큰 충격을 받은 박 의원은 40세 불혹의 나이에 박선영으로 전격 개명했다.


박의원의 기자생활은 유신정권 말기인 1977년 MBC에서 시작했는데, 전후 국가 긴급조치가 빈발할 때여서 휴교사태가 다반사였다. 3여년 후에는 10.26, 5.18이 터지면서 박의원은 과연 이 땅에 민주주의가 존재하는지 깊은 고민에 빠져들었다. “이 땅에 표현의 자유, 언론의 자유가 있는지 무척 자괴감이 들었다. 10.26부터 5.18직후까지는 직접 쓴 기사를 들고 시청 부근의 계엄사에서 검열을 받았다. 중위, 대위들이 문제가 될 성 싶으면 기사에 빨간색 펜으로 죽죽 그었다.”


박선영의원은 1983년도에 프랑스 소르본느 대학에서 국비장학생으로 1년 간 유학한다. 귀국하여 다시 독일로 가서 수학에 전념했고 한국으로 돌아오자마자 사표를 냈다. “당시 법대 여교수는 이대, 숙대를 빼놓고는 외국어대학 한 군데 밖에 없었다. 그래도 예쁘게 봐주셔서 교수의 터전을 잡았고 동국대에서 최종 둥지를 틀게 되었다."

▼ ‘한글사랑? 남북한 인권’에 깊은 관심
박선영의원의 한글 사랑은 남다르다. 1992년 한글날이 공휴일에서 사라진 후 한글날을 공휴일로 지정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꾸준히 제기되었다. 2007년 한나라당 임인배 전 의원이 한글날 공휴일화 법안을 발의 했으나 무위로 그치고 말았다. 재계에서의 압력이 컸기 때문이다.


박선영 의원은 다른 공휴일은 다 없어져도 최소한 한글날과 제헌절만큼은 공휴일이 되어야 한다는 철칙 신념의 소유자이다. 제헌절 역시 공휴일의 대상이 아니다. 2009년 박선영의원은 한글날을 공휴일로 해야 한다는 법안을 대표 발의했다.


“MBC에서 아나운서를 하다가 보도국 기자로 일했어요. 더 철저하게 우리말과 글을 바르게 쓰면서 자연스레 한글에 깊은 애착을 가지게 되었죠.…지하철의 노인용 교통카드를 '시니어패스'라고 지칭하는데, 이 뜻을 알고 사용하시는 분들이 얼마나 될까요?” 박의원은 국어정책토론회, 한글 세계화 세미나, 한글날 공휴일 법안 발의 등 한글 보존과 세계화를 위해 헌신한 노고에 대한 예우로 '한글문화연대'가 선정한 올해의 '우리말 사랑꾼'에 뽑히기도 했다.


박선영의원은 사형제 폐지와 북한인권 촉구에 있어 선두 그룹을 형성하고 있다. 금년 3월 29일 25일 헌법재판소가 사형제에 대해 합헌 결정을 내린 것에 대해 박의원은 "헌재 결정에 많은 아쉬움을 느끼지만 희망의 끈을 놓지 않겠다.…국가와 사회는 중대범죄 피해자와 가족들에 대한 구조와 원조에 대한 더 많은 관심과 대책을 기울여야 할 것"이라며 휴머니스트적 자질을 진하게 드러내었다.


국군포로와 탈북자, 납북자 문제 등 북한인권 의제를 끊임없이 제기해온 박선영의원은 지난 4월 12일 국회에서 "북한정치범 수용소, 나는 이렇게 당했다"란 주제로 세미나를 개최했다. 박 의원은 "북한 주민의 전반적 인권문제도 매우 심각하지만 특히 자신의 죄명도 모른 채 20만 명이 수감되어 있는 북한 정치범 수용소를 조속히 해체하기 위해서 정부는 국제사회에서 목소리를 높여야 한다."고 촉구했다.


박선영 의원 남편은 민일영 대법관이다. MBC 재직 시절인 1985년 사원아파트를 분양받는 과정에서 위장 전입한 사실이 지난해 9월 14일 대법관 인사청문회 쟁점으로 떠오르면서 곤혹을 치루기도 했다. 자녀는 2남을 두고 있다.


◆ 박선영의원 프로필

제18대 자유선진당 국회의원


자유선진당 대변인


現 유럽 헌법학회 부회장


2003-2008년 가톨릭? 동국대 법대교수


1995년 서울대 헌법학박사, 1977~ 1989 MBC기자


1978년 이화여대 법학과 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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