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이호준의 길위의 사람들(17) 싼초 + 거리의 법칙

이호준 / 기사승인 : 2012-06-19 11:0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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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2급인데 생활보호수급대상자인지…확인 좀 부탁합시다” 6.가족

‘307호’
“똑똑똑...”

지민은 초초한 마음에 두근두근 방망이질 치는 가슴을 주체할 수 없어 어제 일을 떠올려본다.

“작은오빠야. 낼 점심때쯤 큰 오빠야랑 올끼다.”
“힝~”
“알았제? 어디가지 말고 꼭 있어야한데이.”
“아..알았다! 올끼제? 자..짜장 사 주꾸마.”

여관 앞 가로등불빛아래서 동생 선희가 봉숭아물들인 새끼손가락을 걸며했던 약속이다. 지민이 거울에 비친 까칠한 낯빛을 확인하며 미세한 어지럼증으로 방문을 민다.

“끼이익~”

화장을 했다지만 대충 봐도 확인될 만큼 부은 눈으로 생글거리는 여동생 선희, 옆에는 충혈 된 눈 둘 곳을 찾는 형수, 그 두 사람 뒤에서 미안함에 고갤 들지 못하는 형, 역시나 눈이 퉁퉁 부어있다. 모두들 지민이 3년을 하루같이 목 메이게 그리워했던 사람들이다.

“힝~ 혀엉. 해..행수님요.”
“..........................”
“오빠야, 잘 잤나?”
“힝~ 서..선희 왔나.”

동생 선희의 인사에 지민이 히죽이며 옆으로 비켜서자 방안으로 들어선 동생이 침대 끝부분에 걸터앉는다. 두 평이 안 되는 방안엔 ‘삐익~큭’ 힘겨움을 토해내는 1인용침대와 화장대, 덜덜거리는 벽걸이선풍기, 그리고 궁색한 옷가지 두어 벌이 재산의 전부인 듯 옷걸이에 걸려있다. 그런데 동생 뒤를 따라 방안으로 들어서려던 지민의 형이 문지방 앞에 무너지듯 주저앉는다.

“어~어~엉~ 내 죽일놈이데이, 동생아~ 용서해도.”

그렇게 동생 선희는 침대에 앉은 채, 문밖에 서있는 형수는 고개를 돌린 채, 형은 문턱 앞에 주저앉은 채로 눈물 보를 터트린다. 1.......10초....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범벅이 되는 흐느낌에 톤[tone]들, 벌쭉이 서서 구경 아닌 구경을 해야 하는 지민은 답답하고 불안하다.

“힝~ 혀..형 짜장 사주까?”
“어~어~엉~ 내 죽일놈이데이, 어~어~엉~”
혀..형, 짜..장 사 줄라꼬, 내 도..돈 많이 모았다.“
“어~어~엉~”
“보..볼래!”

벽에 걸린 바지주머니를 뒤지는 손놀림에 움켜잡은 지폐뭉칠 따라 나와 “짜르릉~~” 온 방안을 헤집는 동전 몇 닢, 지민은 누구든 자신을 행동을 거부하거나 말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형이 독차지한 문지방의 작은 틈을 비집는다.

“쪼..매만 기..다리라.”

슬리퍼를 신는 둥 마는 둥, 서너 계단을 뛰어 내려가더니 “영심이 똥꼬”가 선명한 군청색 쇠 난간을 붙잡고, 슬로우에서 정상으로 돌아오는 화면처럼 말을 더듬는다. 그런데 지민이 말을 다 더듬기도 전에 열리는 2층 직사각형 안내실 창문, 사람머리하나 내놓을까 말까 한 크기다.

“아..주메요. 307호 자..”
“드르륵~~”

얼굴을 반쯤 내민 50대중반의아주머니다. 이런 거래에 익숙한 듯 계단중간쯤 서 있는 지민을 확인하며 답답한 것들을 반문한다.

“자짱 시키주까?”
“예!”
“몇 개,”
“네..개, 보..보통으로예!”
“알았다. 근데 초상 난나?”
“힝~”
“와 이리 시끄럽노?”
“혀..형아가 왔어예.”
“그래도 밤일하고 와가 자는 사람도 있슨까네. 좀 조용히 해도.”

비슷비슷한 사연들을 부여안고 사는 사람들, 감동도, 감격도, 방해만하지 않는다면 죽든 살든 관심도 없는 것이다.

“예~ 죄..”
“타~ㅋ"
“..송합니데이!”

사과를 끝내기도 전에 안내실 창문이 닫히자 기괴하게 흐느끼는 울음소리뿐이다. 지민이 내려왔던 계단을 두세 계단씩 뛰어 올라간다. 60Cm높이 문지방 넘어 방바닥에 이마를 박는 대성통곡[大聲痛哭]을 하고 있는 형, 지민이 한쪽 슬리퍼는 벗지도 못한 채 문지방을 차지하고 있는 형을 뛰어넘어 미끄러지듯 주저앉으며 형의 이마와 방바닥사이에 손을 끼워 넣는다.

“어~엉~쿵, 미안하다. 쿵, 어~엉~쿵,.........”
“아...안된다. 혀..형아.”

이내 치장하는 봄날 햇살처럼 지민의 손등을 적시는 따스함, 슬리퍼를 벗어 문밖으로 던진다.

“혀..ㅇ, 그..만해라. 그래야 해..행수님도 들어오제.”

그렇게 방안에 둘러 앉아 후회와 화해가 뒤엉킨 흐느낌에 침묵이 얼마나 지났을까?

“싼초형. 짜장, ”

탁,탁,탁,탁...... 호들갑스럽게 계단을 뛰어 올라오는 소리, 총알배달, 유효적절[有?適切]하게 등장한 배달[配達]의 기수, 중국집 배달원이다. 지민의 동생이 왔다갔다는 소문을 들은 터라. 심상치 않은 방안 분위기를 외면하며 쪼그려 앉자 자장면4그릇과 단무지를 방안에 펼쳐 놓더니 군청색 사각플라스틱배달통을 들고 일어난다.

“싼초형, 외상이지예?”
“아니, 여기 돈 받아가이소.”

그 동안 할 말 없는 시선을 천정에 뒀던 지민의 형수가 세월의 풍파를 직감 할 수 있는 색 바랜 검정색가죽핸드백[handbag]을 연다. 이에 지민이 한 손으로 입 벌린 핸드백을 가리며 배달원을 향해 말을 더듬는다.

“외..”
“외상이라고예!”
“그래! 오..토바이 조심.”
“예~! 맛있게 드이소.”

몸놀림이 정해진 매뉴얼[manual]처럼 부산하고 계획적인 중국집 배달원, 지민은 다른 때 같으면 살가운 눈인사로 계단 내려가는 발소리가 안 들릴 때까지 확인했을 것이다. 그런데 오늘은 자장면그릇에 씌워진 랩을 벗겨 형 앞에 놓고, 둘로 쪼개 비벼 말끔히 손질한 나무젓가락을 자장면 그릇 위에 올려놓기 바쁘다.

“혀..형아, 어..얼른 먹으라.”
“................”
“도..돈 생기니까. 자..꾸, 형아 짜장 사..주고싶더라. 힝~”

참회의 마지막 의식인 양 자장면을 비비는 형, 그러나 자기합리화로 버텨온 부도덕함이었다. 지난 저녁까지 챙겨먹었던 내용물들을 쏟아내고 만다.

순식 역한 냄새가 방안을 점령한다. 이에 지민의 형수가 지난밤 상황을 짐작케 하는 말들을 핀잔처럼 중얼거리며 핸드백을 뒤져 꺼낸 일회용 티슈[tissue]로 방바닥의 토사물을 덮는다.

“그러게 좀 작작 드시라니깐!”

그러나 미세한 경사[傾斜]를 타고 번지는 속도엔 역부족이다. 방안을 휘둘려보며 일어난 동생 선희가 화장실문을 밀고 들어가 좌변기뚜껑위에 화장지를 집어 든다. 그리고 좌변기 뒤편 벽에 작은 창문을 연다.

“작은오빠야. 걸레 어딨노? 화장실에 있나?”

지민은 동생물음엔 아랑곳이 옷걸이에 걸린 수건을 걷어 잔존물을 흘리고 있는 형의 입을 닦은 후 방바닥의 토사물을 한쪽으로 모으기 바쁘다. 토사물로 축축해진 일회용티슈뭉치를 휴지통에 버린 지민의 형수는 창문을 열어 제치며 벽걸이선풍기조종 줄을 잡아당겨 회전으로 맞춘다. 세월의 때가 시커멓게 굳은 선풍기조종 줄, 날개 돌아가는 걸 못 이기고 덜덜덜 턱,턱, 기계음을 내뱉는 회전을 시작한다. 덜덜덜 반 박자 쉬고 턱,턱,....... 흥겨운 4분의4박자리듬에 약간은 기분전환을 느껴볼 수 있다. 그래도 영상화된 냄새로 범벅이 된 머리가 ‘지끈지끈’ 지민의 동생이 랩도 안 벗긴 자장면그릇을 포개어 문밖에 내놓는다.

“안되겠다. 작은 오빠야. 집에 가서 삼겹살 꾸어 밥 묵자.”

그렇게 지민은 가족이라는 보편적인 가치를 되찾았다. 그리고 작은 리어카 한 대 뿐이지만 과일 장사를 시작했다. 춥고 배고픈 노숙에 지칠 때마다 주문 걸듯 확인했던 인생최대목표 과일장사, 그래도 삶이 팍팍해지고, 무료해지면 부산역을 찾아와 노는 치들 술심부름에 버릇 같은 눈치를 보며 ‘홀짝홀짝’ 술잔을 비웠다. 다른 것이 있다면 꼬지(구걸)가 아닌 과일 팔아 번 돈으로 술심부름을 했다는 것이다.

거리의 법칙


1. 진봉이

준 앞에서 자신의 부하이기를 포기한 두 덩치들에게 질질 끌려 부산역광장을 빠져나갔던 지훈은 중앙동 나성병원에 입원 했다. 그러나 어느 누구 문병은 고사하고 안부전화 한통 없는 상황, 그래서 하루라도 빨리 부산역에 가봐야겠단 마음뿐이었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무언의 경고라 생각한 것인데, 몸이 마음 같지 않아 더욱더 불안했다. 퇴원날짜가 정해지자 잠시라도 잠을 자기 위해서는 수면제를 복용해야 할 정도였다.
그렇게 일주일 만에 찾은 부산역광장, 평일 날 저녁인데도 여름휴가철이라 그런지 많은 사람들로 ‘넘실넘실’ 활기가득하다.

“저기 저거! 지훈이 아니가? 이제 괜찮은가베!”
“자슥, 살 찟네. 병원 밥이 좋킨 좋은갑다!”
“언제 나왔노? 몸은 괘안나?”
“괴안심더.”
“일루와 앉아라. 한잔하자.”
“.............”

몇 발자국 떨어진 담요 위에 신문지로 얼굴을 가린 채 누워있는 한명을 배경으로 라면박스를 깔고 앉아 조촐한 술판을 벌린 4명의 노숙부랑인들이다. 지훈의 우려[憂慮]와는 다르게 손을 까불리며 앉을자리 권하는 엉덩이를 ‘실룩실룩’ 바쁘다. 뒷머리를 매만지던 지훈이 앉자 나이 비슷해 보이는 노숙부랑인이 소주잔을 권한다.

“자 한잔 받으라. 몸은 괘안나?”
“예 괜찮십더.”
“그래! 다행이다.”
“................”
“그라고 준이 행님 보면 빌어라. 니 아무리 용빼는 재주가 있다 해도 안대는 거 안다 아니가.”
“.......................”
“니 옛날에 3대1로 싸우는 거, 안 봤나?”
“알겠십더.”
“그래! 막말로 부산역에서 쭌이 행님 신세 한번 안진 사람 있나? 아픈 사람 병원 보내고 작업화에, 옷에, 잠자리, 밥 한 술이라도 신세 안 짓나 말이다.”
“죄송합니더. 행님들도 용서 하이소.”
“니가 무슨 죄가 있겠노. 할 일없는 세상이 지랄이고 술이 왠수다 아니가. 뭐 하노? 한잔 쭉~ 마시라.”

맞은편에 앉아있는 나이먹은노숙부랑인의 푸념 섞인 재촉에 지훈이 고개를 돌리는 예를 표하며 술잔을 들이킨다.
버릇처럼 모여 시작했던 술자리가 말 섞을 공통의 화재거리로 화기애애[和氣靄靄]해져가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도 잠시, 따라주는 술을 벌주인양 연거푸 들이키던 지훈이 개 버릇 남 못준다고 술 취한 목소리를 높인다.

“부산역, 웃기지마라. 내 다~ 작살 낼 끼다. 알겠나. 머리 긴 놈 어딨노. 오라케라. 오늘 끝장내고 말끼다.”
“와 이리 시끄럽노?”
“뭐꼬?”

불퉁하게 내뱉은 지훈이 고갤 돌리자 얼굴에 신문지를 걷어내며 상체를 일으키는 사내, 전직이 조직폭력배인 진봉이다. 급하게 입 꼬리를 올린 지훈의 미소가 묘[妙]하다.

“아! 진봉이 행님.”
“조용히 처 무으라. 새꺄, 그렇게 처 맞고도 정신 못 차리면 닌 인간도 아니야.”

진봉은 아침부터 푼 술 때문에 몸이 힘들어 술자리 옆에 담요를 깔고 누웠었다. 얼마나 잤을까? 악몽처럼 들리는 낮 익은 악다구니, 눈을 떠보니 꿈에라도 나타날까 전전긍긍[戰戰兢兢]했던 지훈이다. 그러나 일주일 전 지훈의 부하 뒤통수를 후려치고 줄행랑을 친 일이 있기에 일단 모르는 척 누워있었다. 그런데 점점 도를 넘는 술주정에 분을 참지 못하고 불퉁한 목소리를 높이며 일어난 것이다.

“행님, 자다 말고 뭔 봉창[封窓] 뚜드리는 소린교?”
“뭐~ 니 아직 덜 맞았제?”

2. 조직 폭력배

진봉은 부산에서 나고 자란 부산사나이다. 그런 그의 삶에 중요 고비 때 마다 영향을 미친 것은 가난이었다. 가난은 뭘 하든 한계였고, 조직폭력배가 된 가장 큰 이유이기도 했다. 굳지 핸디캡[handicap]이라고 한다면 키가 좀 작다는 것인데, 타고난 체격에 불같은 성격과 지방대학이라도 대졸학력이란 시대에 맞춰 변화를 추구해야하는 폭력조직에겐 탐나는 조건이었다. 한마디로 화려한 폭력전과로 얼룩진 인생이었다.

그 결과 40이 다된 나이에도 충성을 맹세한 조직과 두 주먹뿐, 매일매일 여자를 끼고 살았으면서도 등 부비며 살 여자 하나 못 만났고, 조직을 위해 소, 돼지처럼 일 했으나 탈탈 털어도 고작 몇 백이 전부였다.

사람들은 이런 진봉을 돈도, 빽도 없이 주먹이나 휘두르는 쌩 양아치로 치부했는데, 어느 순간부터는 형님 동생들 틈바구니에 끼어 눈치나 봐야하는 신세가 되어 있었다. 어떤 땐 자신의 위치를 고수[固守]하기 위해 억지를 부려야하는 그야말로 숨 쉰다는 것 자체가 죽을 맛의 악전고투[惡戰苦鬪]였다.

그렇게 천덕꾸러기가 돼버린 진봉, 언제나처럼 늦은 오후 여관방에서 눈을 떴다. 3류 포르노[porno]에 달아오른 TV만 자지러질 뿐 지난밤과 연결할 수 있는 기억은 없다. 익숙한 두통과 숙취, 방바닥을 더듬는 손놀림에 부딪치며 넘어지는 소주병들,............. 변함없는 하루일과의 시작이다. 골라잡은 소주병을 나팔 불듯 쪽쪽 빨아본다.

“참! 알뜰히도 처 묵읏네. 씨팔.”

그러나 목을 타고 넘어가는 몇 방울의 충족이 맛본 이상만큼이나 허무할 뿐이다. 치밀어오는 짜증을 내동댕이 쳐본다.

“으아. 씨팔, 확! 돌아삘겠네. 리모콘[remote] 어딧노?”

언제나 그랬듯 어제 밤 화장실에 놓고 나온 리모컨이 방안에 있을 리 만무하다. 알면서도 이러는 것은 술 앞에 무기력해지는 자신을 추스르기 위한 일종의 최면요법이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방바닥에 어질러져있는 옷들을 서둘러 챙겨 입고, 구두를 신는 둥 마는 둥 현관을 나선다. 비몽사몽[非夢似夢]간에 전해오는 알콜 기운은 참아내는 인내[忍耐]가 아니라 참기 힘든 고통이란 걸 경험으로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서둘러 현관문을 나섰는데 “따르릉 따르릉....” 바지주머니 속 휴대폰이 타는 속을 몰라주는 호들갑을 떤다.

“말 하이소.”
“내다.”
“행님! 상식이 행님 아닙니꺼! 몸 건강하시지예?”
“자슥 섭섭하구로 연락 한번 없고,”
“죄송합니더. 면목이 없어서.....”
“그래, 니는 어떤노?”

잊을 수 없는 비음 섞인 중간 톤의 목소리, 진봉은 울컥한 감정을 숨길 수가 없다.

“해...행님 진짜 죽을 맛입니더.”
“니 지금 우나?”
“행님이 보고 싶어서 안 그럽니꺼.”
“짜슥아 그럼 연락을 하지,”
“......................”

진봉은 호의호식[好衣好食]까지는 아니더라도 끼니걱정 없는 순조로운 삶을 살고 싶었다. 그래서 부산에서는 누구나 가고 싶어 하는 대학에 당당히 합격해 누구보다 더 열심히 공부했고, 군대생활 또한 착실하게 마쳤다. 그것이 가난한 자신이 사회에 나가 누릴 해택을 위한 필수 과정이라 믿었다.
하지만 몸뚱이 하나 믿고 부딪친 사회는 학교에서 배운 것과는 달리 외모지상주의, 허영, 배신, 권모술수, 집단이기주의 등이 승승장구[乘勝長驅]하고 있었다. 정의와 진실, 근면, 협동...... 등은 국민의 자격이기보단 그런 것들에 숙련된 인간들이 만들어놓은 법과제도의 쓰레기에 불과할 뿐이었고, 번드르르한 차림의 인간들이 보기 좋게 씹어뱉은 현실, 미래, 꿈, 희망,,...등은 암담한 현실을 더욱더 실감케 하는 최면술에 불과 할 뿐이었다.
이런 모순 속에서 어떡하든 할 수 있을 것이라 믿었던 취업마저 힘들어지자 진봉은 어딜 가나 잉여인간[剩餘人間]취급이었다. 돈도, 빽도 없이 두뇌만 비대한 잉여인간, 생산적 사회활동이라고 해봐야 고등학생 때부터 짬짬이 해온 노가다가 전부였다. 그런 내일을 장담할 수 없는 현실에 일당을 들고 술집이나 성인오락실을 ‘기웃기웃’ 걸핏하면 싸움질을 했다. 무슨 일을 하던 시작부터 좌절을 맞봐야 했던 진봉에겐 존재감을 확인할 무언가가 필요했던 것인데, 한판 싸움은 좋은 구실이었던 것이다. 때문에 힘에 부친다 싶으면 병을 깨든, 칼을 뽑든 그야말로 죽기 아니면 살기였다.
덕분에 어느 순간부터는 골목골목의 양아치들과 어깨를 견주게 되는 만만치 않은 존재가 되었다. 그러나 이익을 위해선 언제, 어느 자리든 주먹다짐을 할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기 때문에 친구라 할 수 없었고, 그것이 현실이 된 것은 그리 오래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노가다일당을 챙겨든 진봉이 든든한 주머니 사정에 평소처럼 인사를 건네는데, 다짜고짜 몽둥이질에 구둣발길 질을 해대는 동네양아치들, 진봉은 “나한테 왜 이럴까?”란 의문을 되 뇌이며 ‘깔딱깔딱’ 숨넘어가기 일보직전이었다.

“고마해라. 그러다 아(아이)~ 상하겠다.”

비음 섞인 중간 톤의 목소리, 다섯 명의 덩치들이 일제히 동작을 멈추며 소리 나는 쪽을 쳐다보았다. 자신들보다 머리하나가 작은 덩치, 하지만 논다는 치들이라면 알아보기엔 충분한 실루엣[silhouette]이었다. 약속이나 한 듯 뒤로 한 걸음씩 물러서며 깍듯하다 못해 머리가 바닥에 닿을 듯 인사를 했는데, 그 작은 덩치가 바로 부산경남지역폭력세계에서 끗발을 날리던 칼잡이 정상식이였다. 그 후부터 진봉은 모든 걸 운명에 맡기기로 하고 상식을 수족처럼 따라 다녔다. 상식 또한 대학물 먹은 학력에 무엇보다도 죽기 아니면 살기로 버티는 진봉을 눈 여겨 봐왔던 터였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상식의 식견과 깡다구를 앞세운 진봉의 우격다짐은 꿍짝이 잘 맞아 서로의 든든한 뒷배가 되었다. 진봉은 그렇게 조금만 더 악독하고, 비열해지면 폼 나는 인생을 살 것만 같았다. 그러나 상식이 큰 형님들의 부름을 받고 서울로 올라가버리자 진봉의 인생이 꼬이기 시작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연이은 조직 내 일에 대한 실패는 그야말로 치명적이었다. 그럼에도 이렇게 4년을 조직에 빌붙을 수 있었던 것은 온갖 뒤 담화와 술수가 판치는 조직세계의 든든한 후원자요, 직계형님인 정상식의 성공신화 덕분이었다.
서울로 간 상식은 강남 중심가에 제법 큰 룸싸롱에 나이트클럽을 3~4개씩이나 개업하는 등 사업가로서 ‘승승장구’ 했다. 주먹깨나 쓴다는 청소년들이까지 추종조직을 만들 정도였는데, 진봉에게 그것은 언젠간 상식이 자신을 부를 거란 믿음이었고, 4년 동안 악착같이 버틴 이유이기도 했으며 조직이 쓸모없는 진봉을 붙잡고 있었던 유일한 이유이기도 했다.

“그래. 식구들이 안 챙겨 주드나?”
“행님. 지는 행님 없는 부산이 싫습니더.”
“차~"
“지~ 행님한테 올라가면 안되겠십니꺼?”
“그~래!............ 그럼. 계좌번호 찍어도”
“아닙니더! 행님! 차비정도는 지가 알아서 할 수 있습니더.”
“자슥이, 와 이리 말이 많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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