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조 석학 중 한분인 이율곡이 거침없이 토해낸다. ‘전신정시김시습(前身定是金時習, 내 전생은 김시습이었다)’이라고. 거기에 더하여 “절의를 표방하고 윤기(倫紀, 윤리와 기강)를 붙들었으니, 그 뜻을 궁구해보면 가히 일월(日月)과 그 빛을 다툴 것이며… 백대의 스승이라 하여도 또한 근사할 것이다”라는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김시습은 조선시대뿐만 아니라 우리 역사를 통틀어 천재요 기인이라 불리는 데 조금도 손색없는 인물이다. 하지만 타고난 천재성과는 달리 생은 한없이 곤궁했고 고독으로 점철된 방랑의 노정이었다.
이 부분에 대해 반문하지 않을 수 없다. 일찍이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세종이 출세를 보장했었고 그의 아들 세조가 여러 차례 출사를 제의했건만, 왜 김시습은 끝까지 그를 거부하고 방외인으로 살다갔을까!
이는 전적으로 김시습의 선각자적 기질에서 찾아야한다. 그는 유교국가인 조선에서 유교가 무용지물이 되는 현상을 지켜보며 시대를 초월한 이상을 추구했다. 아울러 모든 분야에서 선각자적 기질을 지닌 김시습의 관점에서 시대상황은 사유의 대상조차 될 수 없었다.
그런 연유로 유교적인 길에 조선이 금기시했던 불교적인 사상의 옷을 입고 도교적인 호흡으로 걸어갈 수 있었다. 이러한 김시습의 유불선 삼교일치는 시대를 초월한 깃발이요 푯대였다.
또한 실천적인 행동을 통해 노동의 중요성을 설파했고 다도를 통한 구도적 형식을 전파했으며 문학을 통한 시대의 목소리도 높였다. 그 대표적 산물이 그의 사상이 농축되어 있는 최초의 한문소설 ‘금오신화’다.
이러한 김시습의 사상과 철학 그리고 시대를 초월한 선각자적 삶이 가장 많이 녹아있는 곳이 바로 수락산이다. 11년간 머물면서 불의에 대항했고, 서슴없이 파계할 정도로 열렬한 사랑도 했으며, 그의 존재 전체가 담겨있는 사상도 정리했다. 관향인 강릉과 태어난 곳인 명륜동과는 달리 또 다른 의미에서 노원을 지목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역사적 인물들의 가치가 폄하되는 경우를 종종 본다. 그중에서도 김시습은 다방면에서 새롭게 조명되어야 될 인물이다. 그의 인생은 어디에서 보아도 장엄하고 웅숭깊고 기묘하다. 하여 수락산을 배경으로 사상을 꽃피웠던 김시습의 삶을 재조명해보았다.
2012년 여름에
황 천 우
“허허, 이놈이. 네놈의 눈깔은 뭐한다고
달려 있느냐. 이 산을 잘 살펴보아라”
수락산에 들며
“스님, 천천히 좀 가세요.”
“그러지 않아도 그만 가려한다.”
설잠 김시습이 걸음을 멈추고 숨을 몰아쉬며 따라오는 만득에게 못마땅한 표정으로 내뱉었다. 비지땀에 뒤엉킨 흐트러진 머리카락이며 휘적거리며 걷는 모양새가 마치 괴수처럼 보였다. 물끄러미 바라보다 혀를 차고는 산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직도 정상 부근에는 군데군데 하얀 눈이 덮여 있었다.
“이곳에 자리 잡으시렵니까?”
어느새 만득이 다가와 시습의 시선이 머무는 곳을 따르고 있었다.
“그럴까 싶구나.”
“도봉산이나 삼각산으로 가시려던 게 아닙니까요?”“도봉산과 삼각산이 웬 말이냐. 혹시나 하고 찾았거늘 역시 잘 왔다 싶다. 내, 이곳에 터전을 잡을 참이다.”“왜 하필이면 이곳입니까? 삼각산과 도봉산을 놔두고요.”
“허허, 이놈이. 왜 자꾸 도봉산, 삼각산 타령이야. 네놈의 눈깔은 뭐한다고 달려 있느냐. 이 산을 잘 살펴보아라.”
시습의 말에 만득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이리저리 눈을 굴리기 시작했다. 멀리 낮은 산들과 우뚝 솟은 봉우리들이 첩첩이 이어지고 어우러져 병풍처럼 보이는 삼각산과 도봉산을 주시하다 시선을 수락산으로 주었다. 두 산만큼 우뚝 솟아 장엄하거나 웅장하지는 않았지만 왠지 안온하면서도 수려했다.
“이제 알겠느냐?”“무언가 조금 다르긴 다른 것 같은데 잘 모르겠습니다요. 제 눈에는 그저 그 산이 그 산 같은뎁쇼.”
“이런 실없는 놈 같으니라고. 눈깔로만 보니 헷갈리지. 이 미련한 놈아. 마음으로 좀 보아라, 마음으로.”
시습의 말이 끝나자마자 만득이 마음을 되뇌며 다시 수락산을 살피기 시작했다. 이어 삼각산과 도봉산을 두루두루 살피더니 시습을 보며 실없이 웃었다.
“아무리 보아도 제 눈에는 이 산 저 산 한 산인데요.”
만득의 너스레를 표정 없이 보고 있던 시습이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정령 그 차이를 모른단 말이냐?”
“예.”
만득이 뒤통수를 긁적이며 짧게 답했다.
“삼각산과 도봉산은 너처럼 단순해 보이지만 수락산은 나처럼 그윽하고 기이하고 뭔가 독특한 느낌이 있지. 이래도 모르겠느냐?”
만득이 다시 실눈을 하고 수락산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잠시 후 빙그레 웃으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찬찬히 바라보니 스님 말씀이 맞는 것 같네요.”“맞으면 맞는 거지, 같다는 말은 또 뭐냐?”
만득이 다시 뒤통수를 긁적이며 히죽이 웃었다.
“자, 쉬었으면 천천히 움직여 보자꾸나.”“머무신다면서 또 어디로 가시게요?”“이놈아, 너는 멋진 곳을 구경만 할 테냐?”
“하오면요?”
“속에서 살아야지, 그 속에서.”
“산속에서요!”
시습이 답은 하지 않고 이쪽저쪽 이모저모 수락산을 살피기 시작했다.
“가신다더니 또 왜 그러신데요?”“무작정 갈 일이 아니라 거할만한 장소를 정한 후에 움직여야겠다.”
만득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더니 물끄러미 시습의 행동만 바라보았다.
“서쪽으로는 은선암이, 산 너머 별지(남양주 별내)쪽으로는 내원암이, 저리 동쪽으로 가면 학림사가, 그리고 학림사를 지나쳐 별지 방향으로 가면 수락사(흥국사)가 있다고 했으렷다.”
이쪽저쪽 쳐다보며 중얼중얼하던 시습이 이윽고 서쪽 편을 그윽한 표정으로 응시했다. 그리고는 이내 서 있던 곳에서 중간 계곡을 주시하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래, 이왕이면 절이 없는 중간 계곡이 좋겠군.”
혼잣말로 짤막하게 내뱉고는 가타부타 말도 없이 마주보이는 계곡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영문을 물을 새도 없이 앞서 가는 시습을 만득이 부랴부랴 뒤따랐다. 본격적으로 계곡에 들자 해가 들지 않는 곳곳에는 아직도 얼음이 하얀 꽃처럼 피어 있었다.
“스님, 정상에 터를 잡게요?”
“허허, 그놈 참. 방금 말하지 않았느냐.”
“뭐라고요?”
“그윽한 곳 그 속에서 살겠다고 말이다. 네놈의 눈으로 그윽한 곳을 알아나 볼 수 있을지, 내 모르겠다만.”
“제가 왜 모릅니까요? 저도 그 정도는 압니다요.”
“그럼, 네놈의 눈엔 그윽한 곳이 한군데밖에 안 보인단 말이냐?”
“그 말씀은…… 그럼, 거처할 곳이 한군데가 아니라는 말씀이십니까?”
“내가 이 산에 터를 잡고자 했을 땐 아예 산 전체를 내 집 삼겠다는 뜻이었느니라. 산을 둘러보고 이왕이면 여러 곳에 거처를 마련할 참이다.”
만득이 갑자기 무겁게 한숨을 내뿜었다.
“왜, 걱정되느냐?”
“걱정은요, 그저.”
“만득아, 너는 내가 주로 거하는 곳만 책임지면 되느니라. 나머지는 내가 놀이삼아 쉬엄쉬엄 지을 테니 말이다.”
시습의 눈치를 살피며 만득이 슬그머니 휴 하고 숨을 내쉬었다.
“이제 안심되느냐?”
“무슨 말씀이신지요?”
“허허, 이놈이. 좋아서 한숨까지 내쉬고 딴청은.”“알아채셨습니까요?”
“이놈아, 내 항상 자연과 하나 되라 하지 않더냐. 자연과 하나 되면 들으려 하지 않아도 저절로 알게 되고 말하지 않아도 절로 통하게 되느니라.”
만득이 겸연쩍은 듯 뒤통수를 긁적였다.
“스님. 사람이 어찌하면 자연과 하나 됩니까요?”
“어찌어찌한다고 되는 게 아니니라. 그저 이 한 몸도 세상의 일부려니 생각하고 자연의 법칙에 따르고 그 순환에 순응하면 되는 게야.”
“저는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그러니까 아직도 그 모양이지.”
“그러나저러나, 스님!”
“또 뭐냐?”
“저…… 배고프시지 않습니까요?”
시습이 걸음을 멈추고 만득을 돌아보았다. 땀에 젖은 헝클어진 머리카락과 여기저기 터지고 때에 찌든 더러운 옷하며, 몰골이 딱 비렁뱅이였다. 잠시 주변을 살피던 시습이 계곡 아래 양지바른 곳을 확인하더니 다짜고짜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곳에 도착하자마자 바랑을 내리고 웃옷을 벗었다. 한순간에 달궈졌던 몸이 서늘해졌다. 잠시 심호흡을 하고는 아직도 얼음의 흔적이 군데군데 남아 있는 개울물에 머리를 담갔다 꺼냈다. 차가운 기운이 온 몸에 스며들어 금방이라도 얼어붙어버릴 듯했다.
만득은 자신이 물을 뒤집어 쓴 듯 오들오들 떨면서 시습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고 있었다. 만득의 걱정스런 시선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시습이 손에 물을 적셔 얼굴과 상체를 씻고는 손바닥으로 문지르며 일어섰다.
“이놈아, 뭐 하고 있느냐. 어서 내려와 몰골 좀 닦지 않고.”
시습이 만득을 힐끗 쳐다보고 몸을 구부리더니 개울 주변을 어슬렁거리기 시작했다.
“스님은 뭐 하시는데요?”
“네 놈 배 채워주려 그런다.”
시습의 말이 믿기지 않은 듯 만득이 잠시 머뭇거렸다.
“어서 씻으라는데도.”
시습의 호령에 만득이 급하게 개울로 내려와 땀과 먼지로 범벅된 얼굴과 상체를 닦기 시작했다. 한참 호들갑을 떨며 씻고 일어나자 시습이 바위 밑에서 겨울잠을 자고 있던 개구리를 한 움큼 잡아 돌아왔다.
“자, 어서 불 피우자꾸나.”
“이걸로 요기하게요?”
“그러면.”“이걸로 어찌 요기가 됩니까요?”
“허허, 그놈 참. 말도 많구나. 이것으로 일단 허기진 배를 채우고 더 들어가서 밥 해먹으려 했건만. 싫으면 관두어라.”
만득의 얼굴에 그제야 화색이 돌았다. 이내 젖은 머리를 흔들어대며 잔가지들을 주워 모아 양지바른 곳에서 불을 피우기 시작했다. 오래지 않아 불이 붓자 시습이 개구리를 조심스럽게 불 위에 올려놓았다. 만득이 군침을 흘리며 개구리를 뒤적여 굽기 시작했다.
한동안 말없이 만득의 행동을 지켜보던 시습이 노릇노릇 알맞게 익어 먹음직스럽게 보이는 개구리 한 마리를 집어 들었다. 이어 만득에게도 먹으라는 시늉을 하고는 아주 낮게 나무관세음보살을 읊조렸다.
시습의 먹는 모습을 물끄러미 보면서 정작 배고프다고 투정부렸던 만득은 목구멍으로 침만 넘기고 있었다.
“왜 허기는 달아났느냐?”
“달아나기는요. 하도 맛나게 드시니 절로 배불러 그러지요.”
시습이 만득의 말에 다정하게 미소 지었다.
“맛있습니까요?”
“맛은 무슨 맛.”
“그러면요?”
“네놈이 아직도 자연의 이치를 모르는구나. 그저 고맙다 생각하고 어서 먹어라.”
시습이 나직이 말하고는 다시 개구리를 집어 들었다. 그제야 만득도 손을 툭툭 털더니 노릇노릇하게 잘 익은 개구리를 집어 먹기 시작했다.
“스님, 어디쯤에 터를 잡으시려고요?”
한동안 게걸스레 먹기만 하던 만득이 말없이 먹고 있는 시습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조금만 더 들어가 보자꾸나. 터를 잡으면 농사도 지을 수 있어야 하니 많이 올라갈 수는 없을 게다.”
말을 되새기던 만득이 빙긋이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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