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천우의 역사소설 - 김시습의 수락잔조(水落殘照)(9)

황천우 작가 / 기사승인 : 2012-09-19 17:0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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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면 뜬 대로 가라앉으면 가라앉는 대로 그저 한데 어우러져 흘러가는 것 아니겠나?


안신의 집 가까이 이르자 집안 분위기가 예전과는 사뭇 달랐다.
사람들도 그렇고 분주한 모습이 필시 집안에 무슨 일이 있는 듯했다. 잠시 집안의 동정을 살피며 들어갈까 망설이는데 시습을 알아본 하인이 눈인사를 하고는 이내 안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안신이 허겁지겁 달려 나오다 시습을 발견하고는 멀뚱히 서서 바라보았다.

“벌써 나를 잊은 겐가?”
“무심한 사람 같으니라고. 어디를 헤매다 이제야 오는가?”
“내가 언제 어디를 갔다고 호들갑인가. 자네 앞에 이렇게 서있는데 말이야.”

안신이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지었다.

“자네 말이 맞네, 맞아. 바로 내 앞에 있지.”
안신이 다가와 손을 잡았다.
“집안 분위기가 왜 이러나?”
“왜, 이상한가?”
“이상하다기보다도 무슨 일이 있는 듯해서 그러네.”

안신이 대답은 하지 않고 그저 싱글벙글거렸다.

“무슨 일인데?”
“좋은 일이네.”
“좋은 일! 그럼 내가 끼어도 될 자리인가?”

안신이 고개를 끄덕이며 시습을 방으로 이끌었다. 물론 곁에 있는 하인에게 슬쩍 신호 보내는 일을 잊지 않았다.

“무슨 바람이 불어 예까지 납시었나?”
“이 사람이 무슨 일이냐고 물었는데 딴청부리기는.”
“아참, 그렇지. 다른 게 아니고.”

뜸을 들이고 있었다. 안신답지 않은 태도임을 알아차린 시습이 미소를 머금은 채 가만히 기다렸다.

“실은 내 아들놈 혼례 준비하는 중이네.”
“혼례라. 상대는 누군데?”
“성균관에서 같이 수학했던 유자빈 선배 기억하는가?”
“기억하다마다. 그 선배는 왜?”
“유자빈 선배에게 동생이 있는데 그 동생의 딸이네.”
“그 유자한인가 하는 사람 말인가?”
“바로 그 사람이네.”
“허허, 이 친구 조금 있으면 할아버지 소리 듣겠군, 그래.”
“내 나이가 어디 장난인가.”

그리 말하는 안신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나이도 나이지만 그토록 노력하는데도 출사하지 못한데 대한 조바심 탓인지 한층 더 늙어보였다.

“그건 그렇고 무슨 일로 찾아왔는가?”
“꼭 일이 있어야만 오는가?”
“그건 아니지만, 어찌 지내는지 궁금해서 하는 말 아닌가.”

빨리 실토하라는 듯 시습을 빤히 쳐다보았다.

“수락산에 터를 잡았네,”
“노원의 수락산 말인가?”
“그렇다네.”

순간 안신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왜 그러나?”“터를 잡았다고 하니 그러지 않는가.”
“그럼, 나는 평생 떠돌아다녀야 한다는 말이냐?”
“자네에게 터란 말은 왠지 어울리지 않아 그러지. 언제 또 길을 떠날지!”
“예끼 이 사람아. 어서 술이나 한잔하세.”

안신과 오랜만에 회포를 풀고 내친김에 한양의 대로를 활보하는 중이었다. 갑자기 뒤에서 소란스런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자 초헌을 호종하는 무리들이 시선에 들어왔다. 지나는 사람들을 물리느라 연신 고함치며 요란을 떨었다.

시습이 초헌에 탄 인물을 유심히 살폈다. 영의정 정창손이었다. 그를 확인하자마자 양손을 허리춤에 붙이고 그 자리에 딱 버티고 섰다.

“이 땡중이 물러서지 않고 뭐하는 게냐?”

앞서오던 갈도 한 사람이 다가와 어깨를 밀쳤다. 순간 시습의 몸이 휘청거렸다.

“이놈이, 지금 뭐라 했느냐?”
“영의정 대감 지나가시니 물러서라 했다, 땡중아. 왜, 다시 말하랴?”
“물러서야 할 놈은 내가 아니라 바로 저 놈이다, 저놈!”

시습이 정창손을 가리키며 욕을 해대자 뒤를 따르던 갈도들까지 합세하여 시습을 에워쌌다.

“그만두어라.”

그들이 몽둥이로 막 시습을 치려는 순간 낮으면서도 근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갈도들이 서로 눈치를 살피다 그중 한 명이 정창손에게 다가갔다.

“대감마님, 무어라 이르셨는지요?”
“그냥 가자고 했느니라.”
“이런 고얀 놈을……”
“고얀 놈이 아니라 한이 많은 중이니라.”
“그렇다고……”

정창손의 지시가 없었다면 금방이라도 시습을 때려잡을 기세였다.

“한 세상 후리질로 살찐 육신, 이제 그만 벗고 떠나거라!”

순간 정창손의 얼굴이 벌겋게 변했다.

“그만들 하고 빨리 가자하지 않았느냐!”

정창손의 목소리가 올라가자 갈도들이 서둘러 길을 잡아 나아갔다.

“이놈아, 그만큼 살았으면 위만 보지 말고 이제는 아래도 좀 보아라!”

시습이 조금도 굽히지 않고 소리를 질러댔다. 갈도들이 돌아보고 제지하려다 정창손의 표정을 살피고는 다시 앞으로 나아갔다. 그러자 이번에는 괴춤을 풀러 내리고 정창손이 가는 방향을 향해 오줌을 갈겼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사람들이 히죽거렸다.

시습이 바지를 제대로 입고 막 길을 가려는데 또 어디선가 벽제(?除)소리가 들려왔다. 소리 나는 쪽을 바라보니 구종별배(驅從別陪)였다. 방금 전처럼 지나갈 길을 확보하느라 초헌의 행차를 알리며 다가오고 있었다. 시습이 또다시 자리에 버티고 서더니 초헌을 타고 오는 사람을 노려보았다. 서거정이었다.

“강중아! 요즘 잘 지내냐?”

서거정이 시습임을 확인하고는 이맛살을 찡그리고는 이내 초헌에서 내려 다가왔다.

“나는 잘 지내는데 후배는 어떠신가?”
“이 정도면 잘 지내는 것 아니겠는가. 내 비록 교자는 타지 못하지만 든든한 다리로 버티고 땅을 밟고 살고 있으니 말일세.”
“항상 건강하니 보기 좋네, 그려. 그나저나 식사는 하였는가?”
“밥은 먹지 않았지만 술은 배부르게 먹었네. 왜 내게 밥이라도 주려는가?”
“자네만 원한다면 밥이든 술이든 내 대접함세.”
“일 없네. 나 줄 밥과 술 있으면 백성에게나 주게.”

말을 마치자마자 획 돌아선 시습이 곧바로 앞을 보고 나아갔다. 혹시나 하고 모여든 사람들의 얼굴에 실망감이 역력했다.

서거정을 따돌리고 피맛길로 접어드니 젊은 시절 자주 드나들었던 주막이 눈에 띄었다. 추억도 생각나고 어느새 취기도 사라져 주막에 들자 주모가 반갑게 맞았다.

“아이고, 신동나리! 왜 이리 무심하셨습니까?”
“신동이 아니라 땡중이라오, 땡중.”

주모와 잠시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는 중에 고개를 돌려보았다. 주막 한 쪽에서 시습을 유심히 살피는 사람이 있었다.

“왜 그러시오. 내 얼굴에 뭐라도 묻었소?”
“그게 아니옵고, 정말로 김시습 아니 설잠 스님이십니까?”

사내가 자리에서 일어나 허락도 없이 시습 앞에 자리 잡고 앉았다.

“그렇소만, 뉘시오?”
“소인이 술 한 잔 올려도 되겠습니까? 조선 최고의 천재를 뵙다니, 이런 영광과 행운이 언제 또 있겠습니까.”
“잘되었네. 스님 혼자이신 모양인데 윤 생원이 모시게.”

주모가 대뜸 윤 생원이라 지칭하는 것으로 보아 자주 들르는 사람인 듯했다. 아무리 살펴보아도 분명 만난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허허, 초면인데 결례가 많소이다.”
“스님은 초면이시겠지만 소인에게 스님은 선망의 대상이십니다.”
“그런 말씀 마시오. 그러다가 해를 입는 수가 있다오.”
“혹시 홍유손의 일을 이름이십니까?”
“그 일을 알고 있소?”

몇 년 전 원각사를 조성하고 낙성식을 거행하는 자리였다. 홍윤성, 서거정, 김수온 등 당대의 내로라하는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때 생면부지의 사람이 다가와 인사했다. 그리고는 “이 조선 산하에서 스님의 학식과 도는 따를 자가 없다는 말을 여러 번 들었습니다. 이 시간 이후로 스님을 스승님으로 생각하며 깍듯이 모실 것이옵니다.”라고 말했다. 결국 그 일이 빌미가 되어 미움을 사더니 귀양살이까지 하게 되었는데 그가 바로 홍유손이었다.

“알다마다요.”
“그런데도 상관없소?”
“그런 일이 생긴다면 저로서는 오히려 영광이지요.”

호탕하게 웃으며 말하는 윤 생원에게서 정이 듬뿍 묻어났다. 오랜 지기라도 만난 듯 윤 생원과의 대작이 길어졌다. 호의가 고마워 한 잔, 지난시절이 떠올라 또 한잔하다보니 평상시보다 더 많은 양의 술을 마셨다.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정갈한 방에 비단 이불을 덮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지난밤의 일을 기억하고자 하였으나 도무지 생각나지 않았다. 그저 윤 생원이란 자와 대작하기 시작하여 평시보다 과하게 마셨다는 일 외에는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기침하였소?”

밖에서 사람 소리가 나더니 이내 방문이 열렸다. 방문이 열리자 신숙주가 안으로 들어왔다. 의외의 인물의 등장이라 시습이 당황했다.

“어떻게 된 일입니까?”
“어제 스님이 한양에 행차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내 일부러 사람을 보내 스님과 대작하게 했소. 그리고 하인들을 보내 이곳으로 모시었소.”
시습이 윤 생원의 얼굴을 떠올리며 피식하고 웃었다.“대체 이유가 뭡니까?”
“방랑생활은 이제 그만 접고 조정에 들어 아까운 재능을 살리자는 게요.”

어제 저녁 일을 더듬어보니 한심스럽기 그지없었다. 지기라고 생각하고 대작한 일도 그렇지만 호의에 감동되어 나눈 술이 계획된 일이었다니. 감쪽같이 속았다 생각하니 자꾸 실실 웃음만 나왔다.

“어찌 말이 없소?”

신숙주의 얼굴을 멀뚱히 바라보던 시습이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에이 더럽다!”

외마디 소리를 지르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방을 뛰쳐나갔다.


압구정 설전

시습이 모내기를 마치고 모처럼 한가한 어느 날 서둘러 집을 나섰다. 나들이 삼아 중랑포에서 배를 타고 나가 오랜만에 한강을 거닐어 볼 요량이었다.

“나오셨습니까요, 스님?”

뱃사공이 한가할만한 시간에 맞춰 미리 연락을 주었었다. 중랑포에 나가니 이미 배를 정박시켜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오늘은 한강으로 나가려는데 되겠소?”
“물론입니다요.”

시습이 배에 오르자마자 뱃사공이 노를 젓기 시작했다. 서서히 물을 가르며 나아가더니 어느 순간 미끄러지듯 나는 듯 물과 같이 흐르고 있었다. 풍경도 세상도 마음도 스쳐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흐르고 있었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자연과의 소통의 순간이었다.
뱃사공이 무언가에 심취되어 있는 시습을 힐끗힐끗 살피다가 헛기침을 해댔다.

“저, 스님. 어디로 모실까요?”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정신을 가다듬고 둘러보니 어느 새 탁 트인 한강이 눈앞에 펼쳐져있었다.

“글쎄, 어디로 가면 좋을까요.”

시습이 혼자 말처럼 중얼거리고는 한강 구석구석을 살폈다. 막상 목적지를 정하지 않고 나선 터라 난감했다. 그 순간 시습의 눈빛이 반짝였다. 낯이 익은 압구정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저기 압구정으로 가세.”

뱃사공에게 압구정으로 가자고 해놓고 유심히 살펴보니 희미하지만 분명 사람들이 있는 듯했다. 또 장난기가 발동했다.

“저 정자에 사람들이 모여 있다면 분명 한명회도 있으렷다.”
“스님. 정말 저리로 가시게요?”

회심의 미소를 짓는 시습과는 달리 뱃사공의 얼굴은 근심으로 일그러졌다.

“그렇소. 가서 한명회의 상판대기나 한번 봅시다.”
“네!”

외마디 소리를 지른 뱃사공을 안심시키고 정자로 다가갔다. 그곳에 있는 사람은 생각대로 한명회와 신숙주였다. 그들이 하던 일을 멈추고 다가오는 시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시습이 아랑곳하지 않고 현판이 걸려 있던 자리를 쳐다보다 빙그레 웃었다. 현판이 걸려 있던 자리가 비어있는 모습으로 보아 한명회의 심사가 가늠되었기 때문이었다.

“어서 오시오, 설잠.”

신숙주가 먼저 흐뭇한 표정으로 시습을 반겼다.

“장난칠 현판도 없는데 예까진 또 어인 일인가?”

한명회가 신숙주와는 달리 게슴츠레한 눈에 다소 경계심을 싣고 시습을 노려보았다.

“모내기도 끝나고 해서 모처럼 나들이 나왔습지요.”

시습이 능청스럽게 신숙주룰 보며 응수했다.

“그렇다면 잘되었소. 우리 역시 날이 좋아 잠시 틈을 내었으니, 합석하십시다.”

신숙주의 살가운 말에 한명회의 얼굴이 점점 더 일그러졌다. 그를 본 시습이 배에서 내리더니 느닷없이 발을 씻기 시작했다. 한참동안 발을 씻더니 몸을 일으켜 저고리까지 풀어헤쳤다.

“어허, 시원하다. 더러운 먼지를 씻어내니 머릿속은 물론이고 뼛속까지 다 깨끗해지는구나.”

시습이 일부러 목소리를 높였다. 순간 한명회가 신숙주를 바라보며 눈을 찡긋거렸다.

“그런데 말이네, 설잠. 발을 씻은 사람이야 깨끗해져 좋겠지만, 더러워진 강물은 어찌하려오?”
“물은 흐릅니다.”

시선도 주지 않고 천연덕스럽게 받아 넘기자 게슴츠레 뜬 한명회의 눈이 반짝였다.

“당연하오. 물은 흐른다오. 발 씻은 물처럼 칼 씻은 물도 마찬가지로 흐르오.”

이른바 계유정난을 위시하여 상왕복위운동 과정에서 희생당한 사람들의 피를 의미했다. 순간 가슴속에서 울화가 솟구쳤다. 잠시 숨을 고른 시습이 거침없이 흐르는 한강 한 가운데를 가리켰다.

“흐를 테지요. 그러나 저기 무엇이 보입니까?”
“세월 아니겠소.”

한명회가 시습이 가리키는 곳을 바라보고는 짤막하게 답했다.

“누구의 세월입니까?”
“세월에 임자가 어디 있나. 뜨면 뜬 대로 가라앉으면 가라앉은 대로 그저 한데 어우러져 흘러가는 거 아니겠나?”

말을 마친 한명회가 신숙주를 힐끗 쳐다보았다. 신숙주는 시습의 천재성을 인정하고 애착을 보이며 늘 자신의 가까이에 두고자 했다. 신숙주의 그러한 마음을 한명회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결국 지난 모든 일은 강물에 흘려보내고 이제는 조정에 들어 재능을 펼쳐봄이 어떻겠느냐는 의미였다.
시습이 듣는 둥 마는 둥 흐르는 강물만 바라보며 딴청을 부렸다.

“왜 답을 않소?”

재차에 묻는 한명회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시습은 여전히 시큰둥한 표정으로 유유히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았다.

“물론 강물에 발을 씻는다고 흙탕물이 되지는 않소. 강물에 칼을 씻는다고 핏물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저 흐르는 강물에서 세월이 보인다 하셨습니까? 대감은 세월이 흐르고 흘러 저 강물처럼 어디론가 가버린다고, 아니 영원히 사라진다고 생각하십니까? 착각이십니다. 자손에서 자손으로 끊임없이 이어지고 이어져 다시 돌아오는 것이 세월입니다. 물론 모습이나 상황은 조금 다르겠지요.”

시습은 “핏빛은 사라졌지만 세월이 그날의 칼 소리를 기억할 것이외다”라고 소리치고 싶었다. 목젖까지 올라왔지만 참았다.
그리고는 말이 끝나기 무섭게 괴춤을 풀더니 정자 가까이 다가가 시원스레 오줌을 갈겼다.

“지금 뭐하는 겐가?”

한명회의 목소리가 심하게 흔들렸다. 신숙주는 말없이 눈만 멀뚱거렸다.

“아마도 이 냄새는 기억할 거요.”

시습이 옷매무새를 다듬는 사이 술병을 든 한명회가 다가와 시습이 오줌 눈 자리에 술을 뿌려댔다. 그러자 흙이 다리로 튀었다.

“이 향기도 남을 것이네.”

한명회를 멀뚱히 쳐다보던 시습이 일언반구도 하지 않고 강가로 다가가서 발을 씻었다.

“썩은 술 냄새나 오줌 냄새나, 무엇이 다르겠소?”

발을 씻은 시습이 배에 오르려하자 다시 한명회가 비아냥거렸다.

“이보시오, 설잠. 후세 사람들이 이 자리를 가리켜 김시습이 오줌 눈 자리라 하겠소, 아니면 한명회가 술을 뿌린 자리라 하겠소?”

시습이 배에 오르며 한바탕 호탕하게 웃어 젖혔다.

“그건 칠삭둥이가 판단할 몫이 아니오.”

시습이 사색으로 변하는 한명회의 얼굴을 힐끗 쳐다보고 다시 한 번 호탕하게 웃어댔다.

“그만 갑시다.”

이제나저제나 안절부절못하고 있던 뱃사공이 그 한마디에 쏜살같이 움직였다. 얼마나 열심히 노를 저었는지 어느새 압구정에서 제법 벗어나 있었다.

“무슨 대화를 나누셨습니까요?”

그제야 안심하고 노 잡은 손에 힘을 뺀 뱃사공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시습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레 말문을 열었다.

“대화는 무슨. 그저 말장난 좀 했소.”
“어떤 장난을 하셨기에 한명회 대감의 얼굴이 저토록 일그러졌답니까?”

뱃사공이 은근히 미소 짓자 시습이 고개를 돌려 아스라이 멀어진 압구정을 바라보았다. 두 사람이 아직도 보고 있는 듯했다.

“달리 한 말 없소. 그저 세상 좀 길게 보라고만 했소이다.”

시습이 다시 하늘을 향해 호탕하게 웃어 젖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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