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습이 잠시 말을 멈추고 안 씨의 얼굴을 슬그머니 바라보았다. 얼굴이 붉게 물들어 마치 활짝 핀 한 송이 작약 같았다. 짐짓 모른 체하고 호흡을 고르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크지는 않지만 평평한 바위도 있고 햇빛까지 들어 아늑해 보이는 곳이 시선에 들어왔다.
“잠시 쉬었다 갑시다.”
시습이 안 씨의 손을 잡고 그곳으로 이끌었다. 그리고는 뒤에서 끌어안은 상태로 바위에 걸터앉았다. 조그마한 안 씨의 몸이 시습의 품에 쏙 들어왔다. 머리카락에서 나는 은은한 향기가 가슴속으로 파고들었다.
“야, 이 사람. 영 딴사람이 되었네, 그려.”
“그러게 말이야. 그런 거 보면 확실히 남자란 짝이 있어야 돼, 안 그런가?”
“그런 면에서는 천하의 신동도 예외가 아니고.”
시습이 혼례를 마치고 처가에서 돌아오자 친구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시습을 반기며 제각각 한마디씩 농을 던졌다. 그러나 시습의 표정은 그리 밝지 않았다.
낌새를 알아챈 안신이 시습의 뒤와 주변을 살펴보았다.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시습아, 새색시는?”
안신의 말에 모두의 시선이 시습의 뒤로 쏠렸다. 반드시 있어야 할 새색시가 보이지 않았다. 서로 얼굴을 쳐다보며 눈짓을 나눌 뿐 어느 누구도 선뜻 말하려 하지 않았다.
살피지 않아도 친구들의 표정이 알만했다. 시습이 손수 들고 온 물건들을 마루에 내려놓고는 다짜고짜 말 한마디 없이 부엌으로 들어갔다. 수저와 잔만 올려놓은 소반을 들고 마루에 자리를 잡더니 이내 보자기를 풀었다. 돌아오는 길에 장모가 직접 싸준 술과 음식들이었다. 물끄러미 쳐다보다 상위에 올려놓기 시작했다.
어느 누구도 반문하거나 선뜻 나설 수 없을 만큼 시습의 행동이 숙연했다.
“뭐하고들 있나, 어서들 올라오게.”
어정쩡한 자세로 서있던 친구들이 슬금슬금 상 주위로 모여들었다. 모두 자리 잡자 시습이 잔을 채우기 시작하더니 먼저 잔을 들었다.
“벌레 씹은 표정들 그만하고 한잔하세.”
친구들이 서로 힐끔거리며 잔을 들었다.
“내가 임을 본 기념으로 마시는 술이니 한 번에 쭉 들이키세.”
시습의 임을 보았다는 말에 친구들의 얼굴에 화색이 돌기 시작했다.
“너 여태 우릴 놀린 거냐?”
“우리는 무언가 크게 잘못된 줄 알았잖아.”
“암튼, 자네 장난기는 알아줘야 한다니까.”
모두가 한마디씩 쏟아내고는 들고 있던 잔을 시원스레 비워냈다. 그러나 안신만은 영 마뜩치 않은 표정이었다.
“시습아, 색시는?”
“친정에서 마무리할 일이 있다고…… 곧 뒤따라오기로 했네."
“도대체 혼인한 여자가 마무리할 일이란 게 무언가? 아니, 아무리 급한 일이라도 그렇지 신랑을 혼자 보내다니, 이런 경우가 어디 있나?”
안신이 숨도 안 쉬고 거침없이 쏘아대고는 그제야 술을 들이켰다.
“그러게. 듣고 보니 좀 이상하네.”
의아쩍게 쳐다보며 하는 말들이 귀에서 윙윙거렸다. 시습이 천천히 술을 따르고는 그대로 들이켰다.
“하던 일이 있었는데 급하게 혼례를 올리다 보니 미처 마무리하지 못했다더군. 그래 내가 잠시 짬을 내주었으니 그 일은 신경 쓰지 말게. 오늘은 그저 내가 임을 보았다는 사실만 생각해주게.”
시습의 태도가 간곡했다.
“하긴, 그럴 수도 있지.”
“그럴 수도 있다니. 이게 말이 되는 소린가?”
“그 이야기는 그만 접자니까. 안주도 푸짐하니 술이나 진탕 마셔보세.”
시습의 표정이 밝아지자 본격적으로 술판이 벌어졌다. 술잔이 한 순배 돌자 지달하가 짓궂은 표정을 지으며 시습을 노려보았다.
“그건 그렇고, 첫날밤은 어땠냐? 신이에게 개인교습까지 받았다며.”
순간 떠들썩하던 술판이 물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첫날밤이라!”
“어떠셨어요? 저도 궁금합니다.”
품안에서 숨죽이며 듣고 있던 안 씨가 수줍게 물었다.
“이제 보니 그대도! 짓궂은 게요 아니면……”
한순간 감미롭게 느껴지던 안 씨의 숨소리가 거칠어지자 아랫배에서 불기운이 솟구쳤다. 잠시 꼭 안았다가 술을 한 모금 마셨다. 그리고는 안 씨의 얼굴을 지그시 내려다보았다.
“이제 본격적으로 말하리다.”
혼례를 마치고 다른 날보다도 더 거나하게 술을 마셨다. 첫날밤을 맞아 색시의 빈 잔에 술을 채워주기 위함이었다. 자리를 파하고 새색시가 있는 방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방문 앞에 다다르자 가슴이 심하게 요동쳤다. 잠시 방문 앞에 서서 향후 전개될 일에 대해 당당하게 처신하자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방문을 열자 칼날 같은 불빛이 새어나왔다. 천천히 방으로 들어가자 불빛을 등에 진 여인이 다소곳이 앉아있었다. 새색시의 고혹적인 자태를 보자 갑자기 몸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심호흡을 하자 술기운이 자꾸 도망가는 듯했다.
그래서는 안 된다고 자신을 다그쳤다. 정신을 바짝 차리고 술기운이 도망가기 전에 새색시의 빈 잔을 채워주어야 했다. 머리를 살짝 흔들고는 조심스레 방문을 닫고 천천히 새색시가 앉아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창문으로 들어온 달빛이 호롱불빛과 어우러져 마치 꿈속처럼 아련했다. 다소곳이 앉아 있는 여인이 새색시인지 천상에서 내려온 선녀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아무래도 좋았다. 더 혼미해지기 전에 새색시에게든 선녀에게든 술을 따라주기만 하면 된다 싶었다.
가까이 다가가 앉아 새색시의 얼굴을 살펴보았다. 순간 절로 몸이 움츠러들었다. 새색시가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차분했기 때문이었다. 들은 바에 의하면 첫날밤을 맞은 대부분의 새색시들은 그야말로 갓 태어난 병아리마냥 몸을 옹크리고 어쩔 줄 몰라 한다고 했었다. 하지만 지금 앞에 있는 색시는 당당함이 지나치다 못해 자신의 기세마저 짓누르고 있었다. 시습이 얼떨떨해 있는데 색시가 자리에서 일어나 방 한 구석에 준비되어 있는 주안상을 들고 왔다.
“이리 오시지요.”
분위기가 이상하게 돌아갔다. 처음으로 맞은 하늘같은 서방님에게 마치 명령하는 듯했다. 잠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런 때면 흔히 등장한다던 구경꾼 하나 느껴지지 않았다. 창문 너머로 어스름한 달빛만이 시습의 첫날밤을 멀뚱히 지켜보고 있을 뿐이었다. 시습이 어정쩡한 자세로 상 앞으로 다가앉자 색시가 술병을 들어 시습의 잔에 술을 따랐다. 안신의 말로는 시습이 새색시의 잔을 채워주어야 한다고 했다. 그런데 일이 거꾸로 돌아가고 있었다. 이건 분명 아니었다.
시습의 잔을 채운 색시가 호리병을 내밀었다.
“이게 뭐요?”
당당하게 말한다고 했는데도 목소리가 심하게 흔들렸다.
“제게도 한잔 주십시오.”
오히려 색시의 목소리가 더 차분했다. 시습이 얼떨결에 술병을 받아 색시의 잔에 술을 따르기 시작했다.
순간 색시가 쑥스러워서 저도 술기운을 빌어 첫날밤을 보내려는 것이라 생각했다. 아니 그렇게 믿고 싶었다. 그런 생각을 하며 은근한 눈길로 색시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묘하게도 술을 받는 색시의 얼굴에서 그 어떤 표정도 읽을 수 없었다.

“드시지요.”
잔이 채워지자 조금의 주저함도 없이 시습에게 잔 들 것을 종용했다. 어쨌든 우선은 그래야 할 듯했다.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상황도 그렇고 사라져버린 술기운도 보충해야 할 일이었다. 시습이 천천히 잔을 들었다. 긴긴밤 색시의 빈 잔을 채워주자 다짐하며 잔을 기울이려다 다시 술잔을 내려놓았다. 막 잔을 입에 대려는 순간 색시의 빈 잔이 상위에 내려졌기 때문이었다.
갈수록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제는 단순한 호기심 차원이 아니었다. 색시 자체에 무언가 문제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어쩌면 혼인 자체가 잘못되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본능적으로 솟구쳤다.
시습이 더 가만히 한숨을 내쉬었다. 석연치 않게 여겼던 일이 현실화되었을 뿐이라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묵묵하게 술병을 들어 색시의 잔을 채워주었다. 그러자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잔이 채워지기 무섭게 다시 비워냈다. 순간 오기가 발동했다. 시습도 단숨에 잔을 비워 내려놓았다. 여전히 색시에게선 그 어떤 표정변화도 없었다. 그렇게 색시는 무표정한 얼굴로 시습의 잔을 채우고 또 시습은 말없이 색시의 잔을 채우며 술병이 오가는 사이 밤은 깊어졌다.
다음날 아침 시습은 홀로 방에 누워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그러면 밤새 술만 마신 거예요?”
“그리되었소. 잔뜩 기대에 부풀어 있는 친구들한테 첫날밤을 그렇게 보냈다는 사실을 차마 말할 수 없었소.”
“그랬군요. 이제 좀 쉬었으니 걸을까요?”
“그럽시다.”
안 씨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 시습이 마음을 가다듬고 일어서려다가 안 씨를 잡았다.
“아직 하루가 가려면 멀었소. 조금만 더 쉬었다 올라갑시다.”
안 씨가 입술로만 살짝 웃고는 다시 편하게 기대앉았다. 시습이 안 씨의 머리에 코를 박고는 포근하게 감싸 안았다.
“내 이야기가 재미없소? 그만 할까요?”
“아니 재미있어요.”
짧게 말을 마친 안 씨가 소리 내어 웃었다. 그런 안 씨를 지긋이 쳐다보며 연잎에 구르는 물방울을 생각했다.
“진정 재미있소?”
“예, 아주 흥미진진합니다.”
시습이 시원스레 술을 마시고는 안 씨에게 내밀었다. 살며시 미소 짓더니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시습이 슬그머니 안 씨의 허리춤을 감싸 안았다. 술 냄새인지 꽃 냄새인지 분간하기 힘들 정도로 황홀했다. 시습이 다시 코를 대고 킁킁거렸다.
어젯밤에 대한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주거니 받거니 술병이 오간 일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행색을 살펴보니 어제 모습 그대로였고 옆에 있어야 할 색시는 없었다. 머리는 지근거렸고 홀로 남겨진 자신의 신세를 생각하니 처량하기 그지없었다.
갑자기 머리가 텅 빈 듯했다. 잠시 멍하니 있다가 창문을 바라보았다. 환한 것으로 보아 해가 중천에 있는 듯했다. 조금씩 상황이 파악되자 천천히 일어나 다시 한 번 몰골을 살폈다. 머리는 헝클어지고 옷은 구겨질 대로 구겨져 새신랑이 아니라 마치 집도 절도 없는 부랑자 같았다.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도대체 어디서 누구로부터 발생된 문제인지 가늠되지 않았다. 마치 출구 없는 통로에 갇힌 느낌이었다. 이런저런 생각에 골똘해 있는데 인기척이 들려왔다. 새색시라는 생각에 급히 의관을 바로 했다.
“김 서방, 기침하였소?”
장모의 목소리였다. 급격하게 온몸에서 힘이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렇다고 모른 체할 수도 없어 일어나 문가로 다가갔다. 방문을 열자 장모가 상을 들고 있는 하녀들을 대동하고 서있었다. 혹시나 하고 주변을 살펴보았으나 색시는 보이지 않았다.
“들어가도 되겠나?”
말없이 한쪽으로 비켜섰다. 하녀들이 상을 놓고 나가자 장모가 무어라 지시하고는 들어와 앉았다.
“앉으시게.”
장모의 목소리가 심하게 떨렸다. 뭔가 잘못되고 있다는 막연한 생각이 점점 확신으로 변해갔다. 하지만 구체화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답답했다. 내색하지도 못하고 잠시 주저하다 짐짓 담담한 표정으로 자리 잡고 앉았다.
“내 사위 볼 낯이 없네.”
잠시 주뼛거리던 장모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 목소리가 여전히 심하게 떨렸다. 아니 운다는 표현이 더 적절했다.
‘제 색시는 어디 있습니까?’라는 말이 맴돌았으나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일의 전말을 장모를 통해 직접 듣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금방 열릴 것 같던 장모의 입은 좀처럼 열리지 않았다. 그저 상을 쳐다보며 한숨만 내쉬다가 이윽고 시습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내 술 한잔 따름세.”
묵묵히 잔을 들자 장모가 눈치를 보며 술을 따랐다.
“나도 한잔 주겠나?”
어디선가 들은 듯한 말투였다. 아련하게 떠올랐다. 지난밤 새색시가 했던 그 말투였다. 시습이 주저하지 않았다. 어제 색시에게 했던 것처럼 장모의 얼굴을 유심히 살피며 술을 따랐다. 색시와는 달리 장모의 표정은 말이 아니었다. 금방이라도 대성통곡할 듯했다.
“한잔하시게.”
시습이 정신을 가다듬고 단숨에 비워냈다. 지난밤과 같은 실수는 또 다시 하지 않겠다는 심산이었다. 그런데 예상했던 일과는 달리 장모는 술잔을 입에 대는 시늉만 하더니 이내 내려놓았다.
“사위에게 면목이 없네. 하나밖에 없는 딸을 제대로 키우지 못한 내 불찰이네.”
기어코 장모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장모의 흐느끼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오히려 연민이
솟구쳤다.
“어찌된 일인지 설명해주십시오.”
“그럼세. 그래야 할 듯해서 내 찾아왔네.”
장모의 입을 통해서 드러난 색시의 실체는 시습이 상상했던 이상이었다. 순간 머릿속이 텅 비더니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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