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무인 집안에서 태어나 무남독녀로 자란 색시에게 웬만한 사람은 상대도 되지 않았다. 게다가 늘 건장한 남자들 틈바구니에서 자라다보니 남자에 대해 별다른 의미를 두지 않았음은 말할 것도 없었다. 특히 아버지의 성격을 빼닮은 색시는 모든 남자는 그저 자신과 동격 아니면 그 이하로 취급했다.
그런 색시가 나이 들어 혼례를 올려야 하는데도 생각은 물론 관심조차 갖지 않았다. 만날 접하는 사람이 남자들이다 보니 무덤덤해진 환경도 크게 한몫했다. 그래서 훈련원 도정이 생각다 못해 궁여지책으로 택한 사람이 바로 시습이었다.
지금까지 보아온 수많은 남자들과는 전혀 다른, 신동이라 일컬은 데다 문재와 학식을 두루 겸비한 시습을 배필로 정하면 변하리라 기대했고 색시도 처음에는 호감을 보였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남자에 대한 색시의 고정관념이 제자리로 돌아왔고 급기야 어제와 같은 일이 발생하게 되었다.
장모의 이야기를 듣고 나자 엉켜있던 실타래가 하나씩 풀리기 시작했다. 내일이야 어떻게 되든 일단 일의 전모를 알았으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시습을 지긋이 바라보고만 있던 장모가 말없이 잔을 채웠다.
“내 사위에게 간곡한 부탁 하나 하려 하네.”
“말씀하시지요.”
“며칠만 집에서 잘 다독여 보내도록 하겠네.”
대답 대신 술잔을 들어 단숨에 들이켰다.
“부인, 사랑하오.”“저도요. 그런데 산에는 언제 오르시렵니까?”
시습이 답은 하지 않고 안 씨를 안고 있는 팔에 힘을 주었다. 힘은 팔에 주었는데 이상하게도 아랫도리가 묵직하니 금방이라도 터질 듯이 팽창되었다. 팔에 힘을 실을수록 향기가 흩날렸다. 그 향기에 취하면 취할수록 몸이 자꾸 안 씨의 몸에 밀착되었고, 밀착되면 될수록 불꽃이 더 거세게 피어올랐다.
장모가 약속한 날이 되자 색시가 집으로 왔다. 색시를 본다고 생각하니 기쁘기 그지없었다. 싱글거리며 색시를 맞으려고 다가가다가 그만 멈춰서고 말았다. 대문으로 들어서는 색시의 모습을 보는 순간 세상이 온통 노란 물결로 출렁거렸다. 바리바리 짐을 둘러멘 하인들을 이끌고 들어오는 색시가 마치 위풍도 당당한 개선장군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함께 온 하인들 역시 이상하게 서먹서먹했고 그들 또한 시습에 대해서는 전혀 개의치 않는 듯했다. 혼자만 이방인이 된 듯 괜스레 위축되었다. 색시가 하인들에게 큰 소리로 가져온 짐들을 마루에 내리도록 지시하고는 집안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마치 시찰 나온 장군처럼 거창해 보이는 행동과는 달리 시간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방 두 개와 부엌이 전부였다.
“내가 거처할 방은 어디입니까?”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시습에게 따지듯이 물었다. 색시의 거동을 보니 기도 차지 않았다. 잠시 어떻게 말해야 할지 난감해하다 더 이상 보고만 있으면 안 되겠다 싶었다.
“거처할 곳이라니, 그게 무슨 말이오?”
순간 색시의 표정이 싸늘하게 변해갔다.
“제가 거처할 안채가 없질 않습니까.”
색시의 말이 금방 이해되었다. 남자가 거처하는 사랑채, 여자들이 거처하는 안채 그리고 집안 하인들이 거처하는 행랑채로 된 집 구조에 익숙했던 색시로서는 당연하다 싶었다.
“그게 말이오.”
답을 하려다가 색시의 얼굴을 보고는 그만 두었다. 싸늘하게 굳어져 있는 얼굴에 실망감마저 더해져 말을 하면 오히려 구차해질 것만 같았다.
“이 집은 남녀 구별은 물론 주인과 하인도 구분하지 않고 사는 모양입니다.”
집안 구조에 대해서 하는 말인지 아니면 가난하기 이를 데 없는 자신에 대한 원망인지 선뜻 판단하기 힘들었다.
“이 집에 방은 오로지 두 개고 눈에 보이는 게 전부요.”
더 이상 물러서지 않겠다는 듯 단호했다. 시습의 말이 끝나자 색시가 다시 집안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잠시 후 하인들에게 자신이 사용할 물건들만 추려서는 안방이 아닌 옆방으로 옮기라 지시했다. 하인들이 눈치를 살피여 행동의 갈피를 잡지 못하고 주저했다.
“빨리빨리 움직이지 않고 뭣들 하는 게냐.”
색시의 불호령이 떨어지자 하인들이 신속하게 움직였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니 지금처럼 안방을 쓰십시오. 나는 옆방을 쓰겠어요.”
이해되지 않았다. 배려하는 말 같으면서도 명령처럼 들렸다. 그야말로 기가 막히고 울분이 솟구쳐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그렇다고 유교의 가르침대로 남녀가 유별해서 살자는데, 그를 두고 가타부타 이야기한다는 것도 우스웠다.
말을 마친 색시가 옆방을 물끄러미 들여다보다 하인들에게 몇 마디 지시를 내리더니 시습을 보고 작심한 듯 입을 열었다.
“이 방이 정리될 때까지 친정에서 머물다 올 터이니 그리 아십시오.”
내뱉듯이 쏟아내고는 이렇다 저렇다 대답도 듣기 전에 휑하니 나가버렸다. 망연자실하여 꼼짝할 수 없었다. 눈앞에서 벌어진 일들이 그저 현실이 아니기를 바랄 뿐이었다.
공교롭게도 색시가 나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안신을 비롯한 몇몇 친구들이 들이닥쳤다.
“색시가 온다고 해서 상견례 하러 왔다.”
연신 싱글거리기만 하는 안신 옆에서 지달하가 느물거리며 말했다. 그리고는 이내 색시가 가지고 온 물건들로 시선을 돌렸다.
“야, 오늘 뱃속에 기름칠 좀 하겠는데.”
자존감에 상처 입고 허탈감에 지쳐버린 시습으로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친구들의 성화가 달갑지 않았다. 시습이 내쉬는 한숨의 의미를 알 길 없는 안신이 바짝 붙어 섰다.
“색시는 어디다 감추었냐?”
그리고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다행스럽게도 친구들이 집 나서는 색시를 보지 못한 모양이었다. 시습이 마음을 가다듬고 표정부터 바꾸었다.
“이 친구들아, 왔으면 들어가지 않고 왜 밖에서 이러나. 어서들 방으로 들어가세. 오늘도 신나게 마셔보
세.”
짓궂은 친구들이 아무리 등을 떠밀어도 새색시를 보아야만 움직이겠다며 한사코 방으로 들어가기를 거부했다.
“이제 안주인이 손님 맞아야 하는 거 아닌가.”
갈수록 태산이었다.
“일단 들어들 가세. 들어가서 내 자초지종 다 이야기함세.”
마지못해 방으로 들어간 친구들을 잠시 기다리게 해놓고 다시 밖으로 나왔다. 일단 부엌으로 가서 소반을 들고 나와 신행으로 가져온 술과 음식 보따리를 풀었다. 시습의 하는 양을 지켜보고 있던 하녀가 급히 다가와 소반을 낚아채다시피 하고는 눈짓했다. 잠시 후 방문이 열리더니 주안상이 들어왔다. 농을 하며 떠들던 친구들의 시선이 일제히 상위로 쏠렸다. 급하게 차린 표는 났지만 내용물만큼은 실했다.
“역시 시습이 장가는 잘 갔구나.”
지달하가 급히 상으로 다가앉더니 젓가락을 들었다.
“이보게, 새색시와 인사부터 나누어야지 않겠나?”
안신의 말에 지달하가 멈칫거리며 시습의 눈치를 살폈다.
“일단 먹자.”
시습의 반응에 안신이 의아한 표정으로 문을 열더니 여기저기를 둘러보았다.
“어찌된 거냐? 새색시 모습이 보이지 않으니.”
안신의 공세가 집요했다. 난감해하던 시습이 드러나지 않게 숨을 골았다.
“일단 짐 먼저 왔다.”
“짐 먼저라니?”

말없이 잔을 채우기 시작하자 친구들의 시선이 시습의 얼굴로 집중되었다.
“그런 눈으로 보지 말고 우선 한잔하자.”
말을 마친 시습이 대뜸 잔을 들어 단숨에 비워냈다.
“집안이 정리되고 난 후에 오라고 했다.”
“그게 무슨 말이냐?”
“한번 둘러봐라. 좁은 건 둘째 치고 너무 지저분하잖은가. 귀하게 자란 사람이 얼마나 난감하겠나. 그래서 단속하고 연락할 테니 그때 오라고 했다.”
차마 돌아갔다는 말은 할 수 없었다.
“아무러면 어떠냐!”
지달하가 음식을 입에 넣으며 한마디 했다.
“하긴 귀하게 자란 색시에게 이런 모습 보이고 싶지 않겠지.”
안신이 미심쩍은 듯 연신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자, 쓸데없는 상상일랑 그만하고 술이나 마시자.”
“정말이지?”
“그렇다고 해도.”
시습이 안신을 향해 씁쓰레하게 웃어보였다.
“부인!”
시습의 부름에 안 씨가 고개를 돌렸다. 순간 시습의 입이 안 씨의 입에 포개졌다. 안 씨가 본능적으로 움찔하자 시습이 두른 팔에 힘을 주었다. 그리고는 몸속 깊은 곳에서부터 솟구쳐 오르는 불덩어리를 안 씨의 입으로 사정없이 밀어 넣었다. 잠시 멈칫하던 안 씨 역시 자신의 몸속에서 피워 올린 불덩어리를 시습의 입속으로 살짝 넣어주었다. 불덩어리가 서로 오가고 뒤엉켰다가는 풀어지며 두 사람의 몸을 오랫동안 뜨겁게 달구었다.
웃기지도 않는 결혼생활이 시작되었다. 한마디로 부부사이는 유별해야 한다(夫婦有別)에 따른 생활이었다. 부부로서의 연이 거기까지라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그러나 부모에 대한 도리는 지켜야 한다 싶었다.
하루는 작심하고 색시가 기거하는 방으로 갔다.
“부인, 안에 있소?”
시습이 헛기침을 해도 반응이 없자 다시 불렀다. 역시 기척이 없었다. 재차 헛기침을 하고는 목청을 높였다.
“부인, 안에 계시오?”
잠시 후 친정에서 함께 온 앳된 하녀가 방문을 열었다. 그 뒤로 옷매무새를 가다듬는 색시의 모습이 보였다. 그로 보아 자리에 누워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하녀가 자리를 피하자 방으로 들어섰다. 처음으로 들어와 보는 아내의 방이었다. 갓 혼인한 새색시의 방답게 화사하기 그지없었다.
“앉으시지요.”
목소리가 떨리는 데다 살짝 상기된 듯했다. 조금 떨어진 자리에 앉아 아내의 모습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부부사이건만 남처럼 느껴졌다. 그것이 바로 안신이 이야기한 바 있는 뽕을 따지 못해서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씁쓸했다.
“하실 말이 있으면 하시지요.”
여전한 냉랭한 명령조였다. 시습이 아랫배에 힘을 주었다.
“혼인한 만큼 부모께 인사드려야 하지 않겠소.”
“물론 인사는 드려야 도리겠지요.”
색시의 말이 애매했다. 마땅히 인사는 드려야 하는데 그럴 수 없다는 듯이 들렸다. 잠시 무슨 말이 나올지 기다렸다.
“어머니란 분이 계모라면서요. 그것도 여염집 여자라고 들었습니다만.”
시습으로서는 할 말이 없었다. 자신 역시 계모에 대해서는 인정할 수 없는 부분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부모에 대한 도리를 저버릴 수는 없지 않겠소.”
“그야 당연하지요. 상황이야 어떻든 친아버지시니.”
색시가 아버지 김일성에 대해서는 왠지 알고 있는 듯했다. 문관이었지만 충순위에서 무관들과 함께 근무했던 터라 면식은 없었더라도 요로를 통해서 들었으리라 짐작했다.
“그러니 날을 잡아 한번 찾아뵈었으면 하오.”
답이 없는 색시의 굳은 표정을 보며 그녀의 생각을 간추려보았다. 며느리로서 시아버지께는 인사를 드려야 하는데 계모는 인정할 수 없다는 것으로 나름 정리했다.
“생각을 말해주구려.”
“이미 제 생각은 충분히 말했습니다.”
순간 가슴속에서 울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런데 참으로 모를 일이었다. 어떤 상황에서도 꺾이지 않았던 기가 어디로 갔는지, 왜 분명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이 사람에게만은 어떠한 행동도 취할 수 없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어쩌면 은연중에 내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해서 그럴지도 몰랐다. 그랬다면 강압적으로라도 모종의 행동을 취했을 지도 모를 일이었다. 아니 진정 자신의 아내라면 이런 일은 아예 생기지도 않았으리라 자위했다.
“그러니까 어찌하겠다는 거요?”
시습이 목청을 돋우었다.
“시아버지께는 물론 도리를 다해야지요. 그러나 계모에 대해서는 재고를 바란다는 뜻입니다.”
역시 목청을 돋우어 퍼붓듯 대꾸했다. 시습이 할 말을 잃고 잠시 침묵했다. 말하고 싶지 않았지만 피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부인은 혼인을 어찌 생각하오?”
시습이 치밀어 오르는 분을 삭이며 나직이 입을 열었다.
“남녀가 만나서 백년해로하는 일이라 배웠습니다만.”
“그럼 우리는 뭐요?”
대답이 없었다.
“우리의 혼인은 정상이 아니라는 말이요?”
역시 대답하지 않았다.
“이 혼인을 물리고 싶소?”
“어차피 혼인한 상태니 그런 말은 그만 두시지요.”
“적어도 그런 생각이라면 최소한의 격식은 지켜야 하지 않겠소.”
“혼인과 격식은 별개 아닌가요?”“별개라!”“내가 계모를 보고 혼인한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기어코 계모는 인정하지 못하겠다!”
“그걸 꼭 내 입으로 말해야 합니까. 듣기로는 정식으로 혼례를 치르지도 않았다면서요.”
집안의 치부까지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것을 보니 더욱 멀리 느껴졌다. 억지를 써서라도 자신의 뜻을 관철시킬만한 여지마저 사라졌다. 아니 있어도 그러고 싶지 않았다.
“도대체 아버지께 인사를 드리겠다는 거요 말겠다는 거요?”
“분명히 아버님께는 인사를 드리겠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신동이었다는 머리로 그렇게 생각이 돌지 않습니까?”
시습이 목소리를 높이면 높일수록 색시의 목소리는 더 올라갔다.
“좋소. 내가 아버지를 모시고 올 터이니 인사를 드리도록 하오.”
말을 마친 시습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렇게 뛰쳐나온 시습이 터벅터벅 아버지 집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멀지 않은 곳이건만 유난히 멀게 느껴졌다. 길을 가면서 자신과 색시의 관계를 생각해보았다. 남만 못했다. 단순히 장모가 이야기한 문제 때문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난하기 이를 데 없고 내세울 것 하나 없는 자신이 우습게 보인 탓이다 싶었다. 천하의 김시습이 자격지심이라니 말도 안 되었다.
생각에 빠져 걷다보니 어느새 아버지의 집에 들어서 있었다. 주변을 둘러보았으나 계모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다행이라 생각하며 막 둘러보려는데 방에서 기침소리가 들려왔다. 마음을 가다듬고 말없이 방으로 들어가 아버지 앞에 앉았다. 얼마 전에 뵈었을 때보다 훨씬 더 수척해보였다.
“왜 혼자 왔느냐?”
아버지의 차분한 말투로 보아 이미 저간의 사정을 알고 계신 듯했다.
“실은……”
말을 마치지 못하고 아버지의 얼굴만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못난 놈 같으니라고.”
의외의 말, 아니 지당한 말씀이었다. 시습이 머리를 숙였다.
“아버지 죄송합니다.”
아버지가 대답 대신 시습의 눈치를 살폈다.
“그게 어찌 네 탓이겠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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