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천우의 역사소설 - 김시습의 수락잔조(水落殘照)(15)

황천우 작가 / 기사승인 : 2012-11-12 20:5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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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부인의 논리로 따진다면 겨울엔 나무들이 모두 죽는다는 말이 되지않소"

아버지의 한숨 소리가 음습한 방안을 휘돌아 시습의 가슴에 꽂혔다. 한숨의 의미를 아는 시습으로서는 그 어떤 말도 위로가 되지 못하리라 생각했다. 그저 죄인처럼 고개만 숙이고 있었다.
“시습아!”
“네, 아버지.”
시습이 고개를 들었다.
“이 아비가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
“무슨 말씀이신지요?”
“그러니까 네 색시가.”
아버지가 말을 하려다 말고 급히 입을 닫았다. 순간 불길한 생각이 머리를 휘감았다.
“무슨 일입니까, 아버지.”
아버지의 눈빛이 심하게 흔들렸다.
“나도 최근에야 알았구나.”
잠시 아버지의 초점 없는 눈빛이 허공을 맴돌았다. 건강도 좋지 않은데다 수심마저 들어찬 얼굴이 더욱 생기 없어 보였다. 불효 아닌 불효와 다름없었다. 가슴이 타는 듯이 아렸다.
“무슨 말씀인지 편안히 해주십시오.”
“그러마. 어차피 네가 알아야 할 일이니.”
차분해진 아버지의 눈빛이 오히려 시습을 위로하는 듯했다.
“네 색시를 어찌 생각하느냐?”
“어찌 생각하다니요?”
“네 색시와 잠자리 한 적은 있느냐?”
전혀 의외의 이야기가 나오자 절로 긴장되었다.
“아직까지 없습니다.”
아버지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레 말했다. 아주 짧은 동안이지만 아버지의 눈에서 절망의 빛이 솟구쳤다 사라졌음을 시습은 분명히 보았다.
“내가 들은 바로는 네 색시라는 여자는, 아니 그를 여자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구나, 좌우지간 여자를 취한다는구나.”
“네!”
청천벽력이었다. 장모에게 들었던 대로 무인 집안에서 태어나고 자라 그저 남자 알기를 하찮게 여기는 정도로만 생각했었다.
“네 색시가 여자를 더 좋아한다는 이야기다.”
순간 색시의 방에서 보았던 앳되고 가녀린 하녀의 모습이 떠올랐다.

시습이 바위 위로 안 씨의 손을 잡아 이끌었다. 얼굴이 발갛게 달아오른 안 씨가 금방이라도 흐느적거리며 무너져 내릴 것처럼 보였다. 시습이 얼른 허리춤을 감싸 안고 그대로 자신의 다리위에 앉혔다. 그러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안 씨가 두 팔로 시습의 목을 휘감았다.
“부인, 내게 와주어 고맙소. 사랑하오.”
“제가 더 고맙고 사랑해요!”
어느새 해가 중천을 지나고 있었다.

저녁 무렵이 되자 시습이 짐을 꾸리기 시작했다. 짐이라고 해야 간단한 살림도구 몇 가지와 책들이 전부였다. 어느 정도 준비가 되었다 싶어 밖으로 나가니 어느새 어스름하게 어둠이 깔려있었다.
천천히 색시가 기거하는 방으로 갔다. 이미 시습의 마음을 알고 기다렸는지 전과는 달리 신속하게 맞았다. 방으로 들어서니 문제의 그 하녀가 준비해둔 주안상을 옮기고 있었다. 하녀를 찬찬히 살펴보았다. 덜 여물었으나 보기에도 탐스러운 과일 같았다. 입가에서 절로 야릇한 미소가 흘러나왔다.
“앉으시지요.”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배신감보다는 오히려 측은한 마음이 앞섰다. 마음가림에 익숙하지 못한 시습의 눈길에서 무언가를 느꼈는지 순간 색시가 곤혹스러워했다. 아랑곳하지 않고 자리를 잡자 색시가 병을 들었다. 시습도 묵묵히 잔을 들었다. 술을 따르는 색시의 손이 미세하게 떨리는 모습을 보자 절로 헛웃음이 나왔다.
“왜 그러시는지요?”
시습의 행동을 주시하던 색시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는지 입을 열었다. 시습이 답은 하지 않고 구석에 앉아 있는 하녀를 바라보았다.
“저 아이가 잘못한 일이라도 있습니까?”
“차라리.”
‘차라리 저 아이와 혼인했으면 지금보다는 나았을 것 아니오.’ 라는 말이 입가에서 맴돌았다. 하지만 말하지 않았다. 대신 술병을 들어 색시의 잔에 술을 따랐다.
“부인!”
부르긴 했지만 어색했다. 막상 할 말도 없어 잠시 망설였다.
“말씀하시지요.”
“내가 부인이라고 불러도 될는지 모르겠소.”
“아무래도 상관없습니다.”
“그럽시다. 부인이라고 부릅시다.”
색시가 시습의 행동이며 말투에서 무언가 낌새를 느낀 듯 긴장하기 시작했다. 눈을 깜박이며 연신 주시하는 모습으로 보아 자신이 가지고 놀았던 천재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경계하는 듯도 했다.
“내 이리 복이 없을 줄은 몰랐소.”
잔을 들고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송구할 뿐입니다.”
말은 그리하면서도 지지 않을세라 잔을 들어 보조를 맞추었다.
“그대가 송구할 일이 무에 있겠소.”
“그럼 모두 덮으시겠다는 말씀인가요?”
시습이 급히 잔을 비우고 손사래 쳤다.
“그게 어디 부인만의 잘못이겠소. 여건이 그런대.”
“그리 말씀하시니 고맙군요.”
색시가 다시 빈 잔에 술을 따랐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다 하녀에게 고개를 돌렸다.
“이름이 무엇이냐?”
갑작스런 질문에 하녀가 움찔거렸다.
“언년이라 하옵니다.”
“언년이라. 나이는?”
“열 넷이옵니다.”
찬찬히 언년의 몸을 훑어보았다. 시습의 눈길에 실바람에도 날릴 듯한 언년의 가냘픈 몸이 파르르 떨었다. 그런 언년의 모습을 보며 잔을 비워냈다.
“네가 한잔 따라주겠느냐?”
갑작스러운 시습의 말에 화들짝 놀란 언년이 앞가슴을 여며 잡고는 색시를 바라보았다.
“그래. 서방님에게 한잔 올리어라.”
서방이라 했다. 그 서방이 어느 서방인지 헛갈려 피식하고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저 언년에게 어서 서방님에게 술을 따르라는 눈짓을 보내느라 색시는 시습의 웃음을 보지 못했다.
언년이 마지못해 몸을 일으켜 시습 가까이 다가앉았다. 은근한 시선으로 바라보며 잔을 들었다. 언년의 손이 심하게 떨렸다.
“내가 너만 못하구나.”
시습이 잔이 채워지는 것을 보며 나직이 내뱉었다. 마치 그 말이 신호라도 된 듯 색시가 앞에 놓인 잔을 비워냈다.
“부인에게도 한잔 따라라.”
시습의 말에 언년과 색시의 시선이 부딪쳐 광채를 발하다가 사그라졌다. 색시와 언년의 손이 심하게 떨고 있었다. 그를 감지한 시습이 능청스럽게 덧붙였다.
“내 부인에게 따르라는 말이니라.”
가까이서 바라본 언년의 가슴이 심하게 요동치고 있었다. 순간 마른침이 넘어갔다.
“언제 떠나시려는지요?”
분위기를 환기시키려는 묘수였다. 하지만 내면의 떨림은 감추지 못했다.
“지금.”
“언제 쯤 돌아오실 계획이십니까?”“그런 기약은 없소.”
색시가 의도적으로 이야기의 방향을 바꾸어 가고 있었다.
“어서 부인에게 술을 따르라는데 무엇 하는 게냐.”
시습이 떨고 있는 언년을 다그치자 색시가 언년을 향해 눈짓을 주었다. 언년이 자리를 움직여 색시에게 술을 따랐다. 술을 따르는 언년의 손이 심하게 떨렸다.
“허허.”
마치 추궁하듯 헛기침을 해댔다.
“어디로 가시는지 말해 줄 수 없습니까?”
“그게 뭐 그리 중요하오. 삼각산에 있는 중흥사로 갈 작정이오.”
“삼각산이라면 예서 그리 멀지도 않건만 굳이 이 밤에 떠나시려 하십니까?”“떠날 거면 일찌감치 떠나는 게 피차에게 좋지 않겠소.”
“이미 어두워졌으니 내일 아침에 떠나시지요.”
말을 마친 색시가 언년에게 고개를 돌렸다.
“굳이 그래야 할 이유가 있소?”
“제 마음이 편치 않아 그럽니다.”
“편치 않다니.”
“그간의 일에 대한 보답이라도 표하고 싶어서 그러하옵니다.”
어렵지 않게 색시의 의도를 감지할 수 있었다. 언년이 더욱 심하게 떨었다.
“술을 마시면서 생각해봅시다.”
색시가 단숨에 비워낸 잔을 언년에게 내밀었다.
“너도 한잔해라.”
그 잔의 의미를 아는 언년으로서는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어서 받으라는데 뭐하는 게냐!”
색시는 분명 여장부였다. 그 한마디에 언년이 황급히 자세를 낮추고 잔을 받았다.
“내 너에게 부탁 하나 하려 한다.”
“무엇이온지요.”
말끝이 심하게 흔들려 거의 들리지 않았다.
“먼 길 떠나는 서방님을 위해 이 밤 몸의 수고로움을 마다하지 말라는 부탁이다.”
‘몸의 수고로움 마다하지 말라’ 함은 결국 자신이 미처 하지 못한 역할을 대신 하라는 이야기였다. 시습을 바라본 언년의 눈이 촉촉하게 젖기 시작했다. 시습이 모른 체하며 색시를 바라보았다.
“이 몸이 필요하신가요?”
하마터면 시습의 입에서 둘 다라는 말이 나올 뻔했다.
“모두 부질없는 일이요. 마음이 동하지 않는 합방이 무슨 의미가 있겠소. 괜스레 어린 마음에 상처 되는 일일랑은 시키지 마시오. 나는 모처럼의 이 시간을 망치고 싶지 않소. 또한 이대로 떠날 참이오.”
시습의 말이 끝나자 색시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큰 절을 올렸다.
“무슨 뜻이요?”
마신 술의 양이 얼마 되지 않았는데도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저의 처음이자 마지막 부탁입니다. 그래야만 제 마음이 편할 듯하옵니다. 저 대신 오늘 밤 저 아이를 취해주십시오.”
순간 갈등이 일었다. 아내라는 여인의 진정을 느껴서인지 아니면 한창 팔팔한 나이에 솟구치는 욕정에 사로잡혀서인지 가늠할 수 없었다.
“부인의 뜻이 정히 그러하다면 천천히 생각해봅시다.”
시습의 말이 끝나자 언년이 고개를 돌리고 천천히 술잔을 기울였다.

안 씨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 시습이 대답은 하지 않고 안 씨의 부드러운 머리카락과 상기된 얼굴을 쓰다듬었다.
“그대는 사랑 없이 그 일이 가능하다고 생각하오?”
“아니요.”
안 씨가 애절한 눈으로 바라보더니 시습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순간 사그라지려던 불꽃이 다시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두 손으로 안 씨의 얼굴을 감싸 쥐고 하염없이 바라보는 시습의 눈길 역시 절절했다. 시습도 살포시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사랑하오.”
“저만의 서방님이시지요?” “당연하오. 애초부터 죽을 때까지.”
어느새 하루해가 뉘엿뉘엿 산마루를 넘고 있었다.

송계 가는 길

바야흐로 수락산에 단풍이 절정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마음은 이미 단풍 들어 허구 헌 날 꿈속인데 세상마저 단풍이 드니 사랑하는 아내와 어디로든 다니고 싶어 시습이 안달했다.
“부인, 어서 나오시오.”
추수를 끝마치고 난 어느 한가한 날이었다. 의기가 투합 되어 나들이 삼아 물가로 나가기로 했다. 안 씨가 간단한 요깃거리를 챙기고 있는 사이 시습이 부엌 앞에서 아이처럼 성화를 부렸다.
조그마한 보따리를 들고 부엌에서 나온 안 씨가 애교스럽게 눈을 흘겼다. 그저 싱글거리며 신이 난 시습이 안 씨가 나오자 성큼 다가섰다.
“이리 주시오.”
“괜찮아요. 제가 들고 갈 수 있어요.”
“그래도 주시오. 그 손은 나를 잡아야 하니 말이오.”
시습의 은근한 표현에 안 씨가 못이기는 척 보따리를 건네고 손을 잡았다. 사랑하는 사람의 손을 잡고 가을햇살을 가르며 걷자니 절로 마음에 흥이 돋았다. 슬며시 고개를 돌리니 안 씨의 얼굴 역시 행복감으로 충만해보였다.
“어떻소. 잘 나왔지요?”
“네, 단풍이 이렇게 아름다웠군요?”“그러게 말이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건만 이토록 새삼스럽구려. 그 이유가 무엇인지 그대는 아오?”
“글쎄요. 늘 곁에 있다 생각하고 미처 의식하지 못해서 아닐까요?”
“그도 그렇지만 결국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한다는 사실이 아름다움을 더 일깨워주는 게 아닌가 싶소.”
“그 이야기는.”“부인이 곁에 있어주어 고맙다는 말이오.”
안 씨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는 이내 시습의 손을 흔들며 간간이 콧노래까지 불렀다.
“그렇게 좋소?”
“물론이지요. 이 아름다운 세상에 서방님과 저만 존재하는 것 같아요.”“나도 그렇소. 그런데 부인은 단풍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시오?”
시습의 말에 안 씨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바짝 다가섰다. 그리고는 바람에 나무이파리가 흔들리듯 고갯짓을 했다.
“죽기 전 최후의 몸부림이 아닐까요?”
“허허, 죽다니요.”
“오래지 않아 낙엽으로 한 세상 마칠 테니까요.”
“일리 있는 말이구려. 그러나 만약 부인의 논리로 따진다면 겨울엔 나무들이 모두 죽는다는 말이 되지 않소.”
“그건 아니지요.”
“그러면 부인이 말한 의미는 무엇이오?”
“새로운 탄생을 위한 순환과정, 그를 죽음으로 표현한 것뿐이지요.”
시습이 빙그레 웃었다.
“왜 그러세요?”
“혹 단풍 드는 과정을 알고 있소?”
안 씨가 머뭇거리며 눈을 말똥거렸다.
“나무들이 몸에서 물, 즉 수분을 제거하는 거라오.”
“수분을요?”
“그렇소. 자연의 이치지요.”
안 씨가 자연의 이치를 되뇌었다.
“나무들이 몸에 수분을 간직한 채 겨울을 난다면 어떻게 되겠소?”
나무들이 수분을 간직하고 엄동설한을 보낸다면 얼어 죽을 것이 분명했다.
“그럼 살기 위해서!”
“바로 그거요. 말하자면 월동준비지요. 누가 스스로 죽지 못해 애를 쓰겠소. 살기 위해서라면 몰라도 말이오.”
안 씨가 서서히 물기를 잃어가고 있는 나무들을 바라보며 눈을 깜박였다. 방금 들은 이야기를 다시 한 번 생각해보는 듯했다. 단풍 든 나무의 이파리와 가지 그리고 뿌리가 뻗어나간 모습까지 상상하며 위로 아래로 눈을 굴리는 모습이 앙증맞았다. 시습이 가만히 손을 빼더니 품안에 꼭 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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