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천우의 역사소설 - 김시습의 수락잔조(水落殘照)(17)

황천우 작가 / 기사승인 : 2012-11-27 11:5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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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봐요,함께 있으면 세상도 별 의미없고 시간은 또 얼마나 빨리 지나가오.”
언제부터인가 아내의 안색이 변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조심스레 지켜보면서 두려움이 솟구칠 때마다 더 아끼고 더 뜨겁게 사랑하곤 했다. 때론 이런저런 이유를 궁리하다가 실소하기도 했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틈만 나면 운우지정을 나누니 워낙에도 약한 몸에 기가 소진되어 그런 듯싶어서였다.

아내와의 운우의 맛을 들이면서 정신적으로도 그렇지만 육체적으로도 잘 통한다는 생각을 했었다. 흔히 하는 궁합이 좋다는 말이 이런 것이구나 싶었다. 물론 여자와의 관계는 없었지만 주변 사람들로부터 종종 궁합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었다.

묘하게도 운우지정을 나누고 나면 활력이 솟았다. 체력적으로 자중해야 할 나이가 되었는데도 시습에게는 그것이 오히려 역으로 작용했다. 그런 연유로 때를 가리지 않고 아내를 가까이 했었다.

“힘드오?”
“무엇이요?”

시습이 잠시 망설였다.

“말씀해보세요.”
“그러니까, 우리들 잠자리 말이오.”

아내의 얼굴위로 포만감이 내비치더니 이내 미소로 답해주었다.

“서방님이 사랑해주시는데 힘들다니요. 그저 고마울 뿐인 걸요.”
희미한 불빛에 비친 아내의 창백한 얼굴이 더욱 고혹적으로 보였다.

“이런 말, 해도 될는지 모르겠소.”
“무슨 말이든 다 해주세요.”

목소리마저도 감미롭게 들렸다.

“사랑이 말이오.”“사랑이 뭐요?”
“때때로 드는 생각인데 사랑이 좋은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드는구려.”
“무슨 말씀이세요.”

순간 안 씨의 얼굴에 근심이 어렸다.

“우리를 봐요. 함께 있으면 세상도 별 의미 없고 시간은 또 얼마나 빨리 지나가오.”
안 씨의 얼굴이 다시 밝아졌다.

“신선놀음에 도끼 자루 썩는 줄 모른다더니, 우리가 꼭 그 짝입니다.”
“우리 사랑이 신선놀음과 견줄만한가요?”
“무슨 말을 그리 심하게 하오. 그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소.”

“사실.”
“말해보구려.”
“부부사이가 이렇게 좋은 줄 몰랐어요.”

말을 하고 얼굴을 붉히는 것으로 보아 역시 운우지정을 의미하는 듯했다.
시습이 조심스레 손을 잡아끌었다. 순식간에 피어난 불꽃이 두 사람의 틈을 어느새 모두 녹이고 있었다.

사람살이가 아니 시습의 운명이 참으로 묘했다. 막연한 염려가 점점 현실로 바뀌고 있었다. 하루가 다르게 안색이 창백하게 변해가던 안 씨가 급기야 앓기 시작했다.

과도한 부부생활 때문이라 생각한 시습은 그를 멀리하고 그저 사랑하는 마음 하나로 끌어안고 하루 빨리 원기를 회복하기만 고대했다.

그러나 안 씨의 증세는 부부관계와는 아무 상관이 없었다. 미처 깨닫지 못한 지병이 시간이 흐르면서 심해진 경우였다. 그를 확인했을 때는 이미 되돌릴 수 없는 상태였다. 하루가 다르게 안 씨의 생은 막바지를 향해 치닫고 있었다.

“못난 저를 용서하세요.”
“그런 말 하지 마오. 나를 두고 어디로 간다는 말이오!”
어느 날 밤 손을 놓으면 금방이라도 떨어져 산산조각 날 듯한 생각에 온 힘을 다해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저로 인해 당신 자신마저 버렸는데, 끝까지 함께하지 못해 죄송해요.”

억장이 무너지는 듯했다. 아니 가슴속 깊은 곳에서 칼날이 곤두서 마구 휘젓는 듯했다.

“이럴 수는 없소. 나를 떠나게 놔두지 않을 거요.”

시습이 상반신을 기울여 안 씨를 꼭 껴안았다. 할 수만 있다면 아니 어떤 몸부림을 쳐서라도 결코 보내지 않으리라 마음먹었다. 그러나 시습이 팔에 힘을 주면 줄수록 안 씨의 몸은 자꾸 빠져나갔다. 안 씨의 눈이 점점 감기려 했다. 시습이 얼른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부인, 날 봐요. 내가 여기 있는데 어딜 가려하오!”
얼굴을 마주하고 울부짖었다. 안 씨의 호흡소리가 희미했다.

“안 돼!”
시습의 절규가 다른 세상에 발을 딛으려는 그녀를 깨운 듯 순간 호흡이 미약하나마 다시 이어졌다.
“서방님!”
“말해보구려, 무슨 말이든 해보구려. 내 모두 다 하겠소!”

안 씨가 간신히 눈을 찡그리며 웃어보였다.

“저를 항상 곁에…… 화장해서 이 수락산 서방님 곁에 천년만년……”
힘들게 말은 마친 안 씨의 호흡소리가 서서히 잦아들었다. 얼굴을 잡고 흔들기도 하고 입을 벌려 숨을 불어넣기도 했으나 소용없었다. 이미 건너버린 강에서 안 씨를 되돌아오게 할 수는 없었다.

“안 되오, 부인. 안 되오.”
시습이 흐느끼며 그저 미친 듯이 외마디소리만 외쳐댔다.
“안 돼!”

몇 몇 성긴 별 하늘 궁전 지키고
은하수 맑고 엷어 달은 더욱 분명하네
좋은 일 모두 허사였음을 이제야 알겠거니
이생에서의 만남 다음 생에도 점치기 어려워라

幾介疎星點玉京(기개소성점옥경)
銀河淸淺月分明(은하청천월분명)
方知好事皆虛事(방지호사개허사)
難卜他生遇此生(난복타생우차생)

어찌하여 밤은 그토록 길기만 하던지
새벽녘 둥근달이 성 위 담장에 걸려있네
이제 그대와는 멀고멀어졌으나
만나서 평생의 기쁨 여한 없이 누리었네

夜何如其夜向闌(야하여기야향란)
女墻殘月正團團(여장잔월정단단)
君今自是兩塵隔(군금자족양진격)
遇我却賭千日歡(우아각도천일환)



삶을 반추하다

시습이 하얀 탕기를 허리에 끼고 수락산을 오르고 있었다. 항상 자신을 포근하게 감싸주었던 수락산의 정령들에게 사랑하는 사람을 의뢰할 참이었다. 엄밀하게 의뢰함은 아니었다. 자신의 사랑을 앗아간 수락산에 아내의 육신을 잠재움으로써 그 신음소리에 고통을 당하라는 뜻이었다.

운명과 정면으로 붙어볼 심산이었다. 힘들게 만나 후회하지 않을 만큼 사랑하고 부러울 것 없을 정도로 행복한 순간을 앗아가 난장판으로 만들어버린 운명과 한바탕 붙어볼 참이었다. 시습이 걸음을 멈추고 잠시 계곡을 내려다보았다. 맑은 물이 산 아래로 굽이굽이 흘렀다. 그곳은 아니었다. 아내가 물과 함께 어디론가 흘러가버릴지도 몰랐다.

다시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숲길을 지나 가파른 바위를 타고,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오르고 또 오르기만 했다. 한참을 올라가자 나무 하나 보이지 않고 허허로운 하늘만 가득 드리운 널따란 바위가 나왔다. 세상이 발아래 아득하게 보이는 그곳에서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계곡과 능선이 굽이지고 휘어진 수락산 정상이 환히 보였다. 계곡을 달리하는 그곳까지 가려면 아래로 내려갔다 다시 다른 계곡을 지나 바위 능선을 타고 올라가야했다. 정상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린 시습이 산 밑 계곡을 애절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저 아래 어딘가 아내와 뜨겁게 사랑을 나누었던 장소가 있을 법했다.

시습이 자신이 기거하는 곳을 찾다가 다시 정상을 바라보았다. 그곳에 사랑하는 아내를 홀로 남겨두면 외로울 듯했다. 고개를 천천히 가로저었다. 그리고는 그 자리에서 사방을 둘러보았다.

잠시 후 시습이 탕기에 손을 넣었다. 사랑하는 사람의 육신이 한줌 가루로 만져지자 허망하고도 쓸쓸했다. 아내와의 행복했던 순간들을 떠올리며 가루를 집어 천천히 아래를 향해 뿌리기 시작했다.

때마침 어디선가 불어온 바람이 아내의 육신을 데려가려 했다. 그러나 멀리 가지 못하고 나무와 바위 그리고 둘이서 사랑을 나누었던 계곡의 곳곳으로 살포시 내려앉았다. 수락산 자신의 곁에 천년만년 함께하겠다던 약속을 아내가 지키고자 한다고 여겼다. 차라리 좋았다. 평생 변하지 않고 늘 그 자리에 북 박고 사는 나무와 바위에서 천만년 사랑을 노래하는 편이 훨씬 좋다고 생각했다.

뒤를 돌아보았다. 자신이 기거하는 곳과는 반대 방향이었다. 생소한 그곳에 놓아두면 사랑하는 아내의 영혼이 갈피를 잡지 못하고 떠돌 것만 같았다. 그래서는 안 되었다. 다시 자신의 거처가 있는 방향으로 돌아섰다.

언제고 자신과 함께 있게 해달라는 마지막 말이 떠올랐다. 그 말을 상기하며 손에 들려있는 부인의 육신을 던졌다. 조금 전보다 바람이 더 강해졌다. 가루가 사방으로 흩날렸다. 언젠가 아내와 손잡고 지나쳤을 지도 모를 계곡의 나무들과 다정하게 앉았을지도 모를 바위에 살포시 내려앉았다. 다시 탕기에 손을 넣으려던 시습이 그대로 탕기를 엎어버렸다.

아내의 육신이 함께 지냈던 수락산 위를 날고 있었다. 시습은 우리의 사랑이 깃들어 있는 수락산에서 어떤 고통이나 슬픔도 없이 자유롭게 나비처럼 날라고 절절하게 염원했다. 간절하게 아내가 보고 싶고 만지고 싶었다. 아내를 부른 소리가 나비와 함께 날아가자 그 자리에 주저앉아 오열을 터뜨렸다.

안 씨를 잃고 난 시습이 한동안 두문불출했다. 낮 동안에는 꼼짝도 하지 않고 정자 안에 틀어박혀 술만 마셨다. 그리고 서서히 저녁노을이 물들기 시작하면 정자를 나와 수락산 계곡으로 나갔다. 그 계곡물에 지난 시절을 흘려보내기 위함이었다.

생각할수록 자신의 행적이 한심스러웠다. 안 씨와의 행복한 삶이 영원하기를 간절히 원했으면서도 결과적으로는 자신이 죽인 꼴이 되어버렸다는 자책감을 지울 수 없었다. 차라리 만나지 않았더라면 또 부부의 연을 맺지 않았더라면 어쩌면 아직도 살아있을지도 몰랐다.

게다가 중 주제에 무슨 여자며 팔자에도 없는 아내를 갖겠다고 그리도 기를 썼는지 한심하기 그지없었다. 그런 생각에 빠져들면 들수록 견딜 수 없을 만큼 안 씨가 보고 싶었다. 그런 연유로 시습의 광기는 날이 갈수록 강도를 더했다.

세상으로부터 더 멀어지자며 거처를 산 정상으로 옮겼다. 그곳에 정자를 짓고 ‘폭천정사’라 명했다. 하시라도 여차하면 하늘나라로 가겠다는 발상이었고 그곳에서 미친 듯이 수락산을 샅샅이 훑었다.

그렇게 광기 어린 날들을 보내고 있던 어느 날 선행이 남효온을 대동하고 찾아왔다. 선행의 손에는 술과 음식이 들려있었다. 남효온과 선행의 시선에 비친 시습의 모습은 그야말로 눈뜨고 볼 수 없을 정도였다. 풀어헤친 긴 머리카락은 뒤엉킨 채 떡이 되어 있고 푹 파인 볼과 휑한 눈은 영락없는 귀신이었다.

“소승, 스님을 뵈옵니다.”
“선배님, 꼭 귀신이십니다.”

“귀신이라도 되었으면 좋겠소.”
“일전에 왔었으나 옮기신 거처를 찾지 못하고 수락산만 헤매다 돌아갔지요. 이제야 찾아뵘을 부디 용서해주십시오.”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시습이 선행을 노려보았다.

“저 녀석이 몹쓸 짓을 했구려. 직접 모시고 오지 않고.”

선행이 겸연쩍은 듯 고개를 숙였다.

“선배님, 그런 말씀 하지 마십시오. 늦게 찾아뵈었다고 야단치실 거면 저를 야단치십시오.”
“아무튼 잘 왔소. 선행이 너는 주안상 좀 준비해다오.”

선행이 급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몸을 움직이고 말고 할 필요가 없었다. 그저 마당에 자리 깔고 가지고 온 보따리를 풀면 그만이었다.

“설준 스님께서도 같이 오시고자 했는데 요즘 사정이……”
남효온이 말꼬리를 흐리자 시습의 눈초리가 한쪽으로 올라갔다.

“아직도 여전한 모양입니다.”“여전하다니요! 이제 본격적으로 시작하려는 모양입니다.”
“이번에는 무엇을 가지고 꼬투리 잡았답니까?”

남효온이 대답 대신 가볍게 혀를 찼다.

“왜요? 무슨 말 못할 일이라도 있으신 게요.”
“선배님께 말 못할 일이 무엇 있겠습니까. 그저 답답하니 그러지요.”
“무슨 일인데 그러시오.”

“저, 선배님. 사유를 말씀드리기 전에 부탁이 있습니다. 그동안 뵌 적이 여러 번이지요. 제가 거북해서 그러니 이제 하대하여 주십시오.”
“허허, 그건 안 될 일이요. 내 어찌 추강을 나이로만 대하겠소.”

“하오면.”
“의인에 대해서는 항상 존경심으로 대해야 한다, 이 말이지요. 그러니 그 부분은 개의치 마세요. 그래야 내 마음도 편하니 말이요.”

“과찬의 말씀입니다.”
“과찬이 아니라 진심이요. 그러니 그런 소소한 일에는 신경 쓰지 마시고 하려던 이야기나 계속하지요.”
남효온이 난감한 듯 생각에 잠겼다가 입을 열었다.

“한 양반집 자제가 일을 저지르고 설준 스님에게 도망 온 모양입니다.”
“그런데요?”
“그 사람이 머리 깎고 중이 되겠다고 하니 설준 스님께서 직접 머리를 깎아주신 모양입니다.”
“그러면 되었지, 뭐 그런 일로 시비를 건다는 말이요.”

“그 사유도 참으로 어처구니없습니다.”“어떻기에 그러는 겁니까?”“양반집 자제가 잘못을 저지르고 찾아왔으면 뉘우치게 해서 집으로 돌려보내야지 머리를 깎아주고 법명까지 주었다는 게 그 이유입니다.”
순간 선행이 다가섰다.

“앉아서들 말씀 나누시지요.”
“그럽시다. 우리 앉아서 천천히 나눕시다.”
시습과 남효온이 자리 하자 선행이 어정쩡하게 서 있었다.
“뭐하느냐, 어서 앉지 않고.”
“그냥 두 분이……”
시습과 함께 자리하는 일이 거북스러운 모양이었다. 혹은 승복을 입고 있는 사람으로서 감히 술과는 가까이 하고 싶지 않은 이유도 있을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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