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박홍 신부님 ‘영전에 바치는 헌사’

강인철 수필가 / 기사승인 : 2019-11-23 08:5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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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이념을 두루 한량없이 품으신 大人
학생들과 격의없이 대화했던 ‘막걸리총장’
▲ 필자(수필가 강인철)가 신부님을 처음 뵌 건 30여 년 전 ‘마포연감’ 편집위원으로 서강대학교 총장실을 노크한 거였다.

 

[일요주간 = 강인철 수필가] 맑은 하늘에 춥지도 덥지도 않은 참 좋은 날! 2019년 11월 11일 9시 30분 마포구 예수회센터성당에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예수회장(葬)이 엄수되었다. 78세의 아쉽고 안타까운 나이에 선종(善終)하신 박홍(朴弘)신부님의 장례미사였다. 사진 속 신부님은 언제나 그러하셨듯이 근엄하지만 인자하신 모습으로 나를 바라보며 반갑다 하셨다. 살아생전 집무실에서처럼...

님께서는 가톨릭대학교를 졸업하고 미국에서 영성신학으로 석사를 마친 다음 로마 그레고리안대학으로 옮겨 박사학위를 하는 동안 어렵고 힘들었지만 그래도 공부할 때가 행복했었노라고 젊은 날을 이야기할 땐 어린아이를 닮은 듯 천진했다.

그리고 일찍부터 가톨릭예수회와 함께하며 1970년에 서강대학교 교수로 부임한 후 총장(1989~1997)을 거쳐 이사장(2003~2008)으로 일생을 신앙과 교육에 헌신한 사제요 교육자였다.

민주화를 외치던 시절 신촌로터리에서 일어났던 시대적 혼란의 현장을 몸소 겪으면서 마포사회와도 뗄 수 없는 끈끈한 인연으로 함께 울고 같이 웃었던 기억들이 주마등처럼 스친다.

내가 알기 전부터 신부님은 이미 1970~80년대 민주화 운동에 앞장선 지학순 주교와 뜻을 같이하면서 사회의 이목을 받았고 학교에서는 학생들과 격의 없이 대화하는 ‘막걸리총장’으로 소문이 나 있었다.

1991년 대학생들의 학생운동에 분신자살이 이어지자 이를 우려한 신부님은 ‘지금 우리 사회에 죽음을 선동하는 어둠의 세력이 있다’고 감히 폭탄(?)발언을 해 세상을 놀라게 했다.

1994년에는‘대학캠퍼스 안에 주사파와 사회주의 인식이 팽배해 가고 있다’며 발언 수위를 더 높였고. 날이 갈수록 시국이 어수선해지자 당시 김영삼 대통령과 전국 주요대학 총장이 모인 청와대 오찬 자리에서 ‘주사파 뒤에는 사노맹이 있다’며 ‘심지어 북한의 장학금까지 침투되고 있는데, 이를 심각하게 직시하지 못하고 있는 게 문제’라고 지적해 ‘극우사제’라는 논란의 중심에서 지탄을 받을 땐 너무나 어이가 없었다면서 껄껄 웃으며 과거를 술회한 적도 있다.

우파와 좌파, 주사파, 사노맹, 전대협, 종북과 반미, 보수와 진보의 진영논리 등 고질적인 이분법적 언어들이 책에서나 읽어 봤음직한 낱말임에도 불구하고 최근에 벌어진 희대의 조국 부부 사태를 겪으면서 날마다 귀가 따갑게 들어온 나머지 이제는 쇼킹할 것도 없는 보통의 용어가 돼버렸지만 오래전 1990년대 초 청와대 오찬장에서 신부님이 위와 같은 직언(直言)을 서슴지 않았다는 것은 가히 혁명적인 용기의 결단이었음이 분명하다.

오늘의 시점에서 돌아보면 미래를 꿰뚫어 본 탁월한 혜안이요 예언이었다 아니할 수 없다. 우리 모두가 ‘지금 안 것을 그때 절실히 깨달았더라면...’

올 한 해가 이토록 어수선하지는 않았을 텐데 하는 생각에 이르면 아쉽고 안타까운 마음 헤아릴 길이 없다. 천국에서라도 이 땅의 어린 양들이 더 이상의 혼돈과 방황 없이 자유롭고 공정한 사회에서 모두가 정의롭게 살아갈 수 있도록 이끄시는 목자가 돼주시길 간절히 소망해본다.

숨소리조차 멈춘 듯 엄숙했던 장례미사가 끝이 나고 이어진 이별의 시간, 금방 어서 오게나 손이라도 잡아줄 듯 평온하신 영정이 멀어지는 순간 머릿속이 텅 비어지는걸 견딜 수 없었다.

언젠가 사제관에서 내게 와인 한 잔을 권하시며 ‘그래도 주사파의 실체를 밝힌 건 가장 잘 한 일중 하나’라며 보람을 느낀다 하면서도 그러나 현실이 못 믿어우신 듯 나라 걱정에 물끄러미 창밖을 내다보시던 모습이 영정과 함께 자꾸만 멀어져 간다.

내가 신부님을 처음 뵌 건 30여 년 전 ‘마포연감’ 편집위원으로 서강대학교 총장실을 노크한 거였고, 그 후 아이들 교육문제와 ‘5부자 라이브 인 USA’를 기획하고 다섯(父子)가 북미대륙을 횡단한 다음 1년여 동안 원고를 정리하면서 신부님 보다는 선생님으로서 허물없이 가르침을 받은 건 더 없는 행운이요 영광이었다.
인연이 그렇게 쌓이면서 가끔씩 사사로이 차(茶)한 잔의 담소로 이야기꽃을 피워본 건 이사장실로 자리를 옮긴 후였다. 성경말씀과 더불어 삶을 논하며 시국이야기 등 때로는 심각하고 진지했으나 그러면서도 매우 자유로웠던 님이었는데, 캠퍼스를 떠나면서 그런 기회들도 차츰 멀어지고 말았다.

그리고 오늘 송구한 마음으로 영전을 찾아 장례미사를 드리고있음이 죄스럽기 한량없다. ‘몸이 멀어지면 정(情)도 멀어 진다’했던 옛말을 왜 좀 더 일찍 깨닫지 못했을까.

아니 그 말이 가슴에 사무처 이렇게 마음을 아프게 할 줄을 왜 진즉 몰랐을까 엎드려 용서를 빌어 보지만 후회막급이다

“...참 좋으신 신부님! 깊은 감사의 마음으로 머리를 숙입니다. 천사들이여 영혼을 받들어 천상의 낙원으로 인도하시고 더 높이 영접하시어 맑고 가난했던 나자로와 함께 영원한 안식을 누리게 하소서...” - 隨筆家 강 인 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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