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우리에게는 120년전의 청년정신 약관(弱冠) 차형준이 필요하다

최종문 기자 / 기사승인 : 2019-11-27 15:0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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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병원 창업자 차경섭의 부친 차형준 목사 발자취
1879년 평북 용천 출생 차형준, 20세의 나이에 교회 섬겨
개척전도를 하며 복음 전파에 앞장...서민층 전도활동 펼쳐
▲ 평양신학교 4회 졸업생 故차형준 목사.

 

[일요주간 = 최종문 기자] 2019년의 대한민국은 큰 혼란을 겪고 있다. 현재의 위기극복에 필요한 리더십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한국교회사를 돌아보면 훌륭한 리더의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사례를 발견할 수 있다. [일요주간]은 차병원 창업자 차경섭의 부친 차형준 목사의 발자취를 소개하며 리더에게 배우는 지혜를 나누고자 한다.<편집자 주>

평안북도 정주는 남강 이승훈의 오산학교, 오산교회로 잘 알려진 지역이다. 이곳은 외부 선교사들의 영향을 받은 기독교가 아닌, 우리 자체의 신앙 지도자들이 중심이 되어 기독교가 널리 퍼진 ‘민족교회’의 성격이 강했던 지역이다. 20여개가 넘는 지역 교회 중에서도 정주읍(定州邑) 교회는 1899년 설립, 정주의 모든 교회를 이끌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바로 이 교회를 이끈 사람은 약관(弱冠)의 차형준 (車亨駿) 강도사였다. 정주읍 교회의 강도사로 시작한 1879년 평북 용천 출생인 차형준은 20세의 나이에 교회를 섬겼던 진취적인 젊은이였다. 이는 차형준의 치열한 삶의 시작에 불과했다. 이후에도 꾸준히 개척전도를 하며 복음을 전파하는 일에 앞장서 왔던 그는 본격적으로 신학을 공부하게 된다.


1884년 미국과 호주 등의 선교사들이 대한제국에 들어와 선교활동을 시작했다. 서민층 중심의 전도활동을 펼쳤던 이들 해외선교단은 1901년 '평양신학교'를 세웠다. 6년후인 1907년에는 조선인 장로교 목사 7명이 배출된 것을 시작으로 평양신학교 졸업생들은 한국 교회 전반에서 활동 영역을 넓혔다. 차형준 목사는 이 학교 4회 졸업생으로 1911년 목사가 되었다. 평양신학교는 후일 '조선예수교장로회신학교'로 이름이 바뀌는데, 일제강점기 그 엄혹한 시절 독립운동을 이끌어낸 교계의 큰 축이었다.

 

◈ 평북 노회를 대표하며, 일제에 맞서다

 
조선인 중심의 조선예수교장로회 대한노회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독노회'로도 불리는 '조선예수교장로회 대한로회'는 각 지방별로 7개의 조직을 갖추고 있었다. 참고로, 노회(老會)란 교회가 파송한 목사와 장로의 대표자로 구성된 조직으로 목사 안수와 담임목회자의 임직을 허락하는 등의 임무를 수행하는 교회기구이다. 

 

평양신학교와 대한노회는 1919년 3.1 독립운동에 적극 참여하며 애국 활동에 열심이었다. 그러나 일제가 중일전쟁을 계기로 기독교인에게도 신사참배를 본격적으로 강요하고 자국 기독교 단체 산하로 들어가게 조직을 재편하자 이를 받아들이는 측과 맞서는 측으로 갈라서게 된다. 신사참배를 거부하던 선교사들은 조선예수교장로회신학교를 자진 폐교했고 독노회 산하 7개 대리회중 하나인 평북노회는 일제의 요구에 강경한 입장이었다. 


평북노회는 1907년 평양 장대제교회 예배당에서 조직된 독노회로, 국내와 만주, 중국 산동성 지역 등에 선교사업을 위해 만들어졌다. 다른 여섯 노회와 다른 입장으로 가장 큰 권력으로 서 있던 일본제국주의에 맞서는 결정이 쉬웠을리 없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바로 그 평북노회 소속의 차형준 목사는 여러 차례에 걸쳐 평양과 서울 등에서 열린 독노회 총회에 평북노회를 대표하는 총대로 참석했다. 차 목사의 정신이 평북노회에도 이어지고 있다고 할 수 있는 부분이다.


1915년 간동으로 건너가 만주 한인들을 위한 목회를 담당하고 있던 차 목사는 자신의 안위와 행복을 추구하기 위해 일본 정책에 순응해 친일행위를 하며 신사참배나 하던 다른 목회자들과 달랐다. 차 목사는 목사 신분을 적극 활용하며 남북은 물론, 중국 등을 넘나들며 독립운동을 도왔다. 


이후 일본이 허위 날조한 105인 사건과 3.1운동 등으로 많은 교역자 및 평신도 지도자들이 당국에 체포됐고, 이 과정에서 차 목사 역시 투옥되었다. 오랜 기간 고초를 겪다 석방되었지만 이것이 끝은 아니었다. 차 목사는 1930년대에 충남 철산 등 여러 지역에서 목회 활동을 계속했다. 독립운동을 하는 목사로서 세상에 본 보인 차형준 목사의 삶은 1943년에 막을 내렸다. 안타깝게도 광복을 맞은 조국을 보지 못한채 세상을 떠났기에 그의 삶은 더욱 빛난다고 할 수 있다. 

 

◈ 차형준 목사의 삶, 현재에도 청년 정신으로 이어져


대가를 바라며 해피엔딩을 기대하는 드라마틱한 인생은 아닐지 모르지만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꾸준히 노력해온 삶은 스무살 청년 '차형준'의 정신으로 이어지고 있다. 이같은 증거는 여러곳에서 발견된다. 


일본의 어용기관으로 활용하는 기독교 단체도 있었지만 끝까지 변질하지 않은 채 광복을 맞이한 평북노회는 지금까지도 꾸준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얼마전 교회 세습이라는 교단의 무거운 이슈에 "노회 내 모든 교회 세습 않겠다"는 목소리를 낸 것은 시대와 이슈는 다르지만 옳은 길을 가는 것을 보여주는 차형준 목사의 목소리이기도 하다. 


차 목사의 삼남 차경섭씨가 아버지의 선교정신을 그대로 이어 받아 1960년 중구에 차산부인과 의원을 열었고 이후 손자인 차광렬씨는 이를 이어받아 현재의 '차병원그룹'을 일구었다. 지난 20년간 동남아 지역의 심장병 어린이 환자를 대상으로 무료 수술을 행하고 탈북민의 정착을 돕는 등 사회 곳곳을 살피는 모습은 차목사의 정신이 이어진 또다른 모습이기도 하다. 


난세는 영웅을 만들지만 혼란한 세상을 살아가는 많은 평범한 인생들은 그저 어지러움이 덜하기만 바라기 마련이다. 이를 풀어가는 것은 리더들의 몫이다. 

 

4차 산업시대를 맞아 모든 것이 변한다고 하지만 그래도 하나 여전한 것이 있다면 그건 바로 차형준 목사의 청년 정신이 아닐까? 배우고 도전하고 실패를 두려워 하지 않으며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 청년정신을 아는 리더가 등장하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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