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갈무리..."가을몸짓이 기다려지면서도 은근히 두렵기도 하다"

육인숙 작가 / 기사승인 : 2013-09-04 11:2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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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인숙의 풍경소리(7) [일요주간=육인숙 작가] 얼마 전까지만 해도 닉스의 잔영을 걷어차며 위풍도 당당하게 돌아오던 해가 어느새 서늘한 바람 앞세우고 뒷전에서 어슬렁거리고 있습니다. 덥지도 춥지도 않아 늘 지금만 같았으면 하는 생각이 절로 솟구칩니다. 그러면서도 가슴 한켠에서 쿵 하고 무너지는 마음소리에 자지러지곤 합니다. 서정적 정취가 물씬 풍기는 가을몸짓이 기다려지면서도 은근히 두렵기도 합니다. 약도 주고 병도 주는 가을마음이 가하는 메스에 삶의 선혈이 또 얼마나 낭자할지. 어쨌든 사유하기에 좋은 때가 도래하고 있습니다.

누군가 그랬다지요. 옛일이 자주 떠오르면 그건 나이를 먹었다는 뜻이라고. 결코 부인할 수 없는 말입니다. 일 년의 정사(政事)와 살아온 생의 만사(萬事)가 맞물린 시절에 서고 보니 지난날이 자주 회고되곤 합니다. 어릴 때는 바람이 왜 그리도 많았던지. 현실이 어떠하든 드높은 이상과 손잡고 있으면 무엇이든 다 이룰 수 있겠다 싶었지요. 어릴 때는 어찌 그리 허무맹랑했을까요. 갈팡질팡 우왕좌왕하면서도 마음만 다잡고 있으면 언젠가는 이르리라 흥청망청했으니. 이렇게 순식간에 지나가는 시간이었는데, 이처럼 짧고 허무한 것이 인생인데 말입니다. 한편으론 어쩌면 그리 무모하였기에 질곡의 시간을 지나올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없진 않습니다.

▲ @Newsis
지난봄의 그 꽃이 올봄의 이 꽃이면서도 아닌 것처럼 올가을의 하늘이 지난가을의 하늘과 같으면서도 다르고, 올가을의 기다림이 지난가을의 기다림과 같으면서도 다릅니다. 이렇게 끊임없이 같으면서도 다르게 변화하고 되풀이되며 삼라만상이 존속되는 것처럼, 인간의 삶 또한 매순간 변화를 거듭하며 영위됩니다.

하지만 무위(無爲)로 돌아가면서도 풍요로운 자연의 어김없는 섭리와는 다르게 인간에게는 풀리지 않는 무언가가 있습니다. 바람이 불되 이 바람이 지난가을의 바람인데 반해, 꿈을 꾸되 지금의 꿈이 지난해의 꿈이 아니고 지금의 삶이 바라던 삶이 아니라는 딜레마가 바로 그것입니다. 자연은 억만 겁이 지나도 한결같은 이치로 변화하는데 인간의 삶과 꿈은 시간이 지날수록 퇴색되고 변질되고 반비례합니다. 게다가 삶을 마무리해야 할 시기에 회한으로 얼룩진 초라한 모습으로 안달복달하다가 마침내 돌아가게 됩니다. 이생에 무슨 미련이 그리 많아 후회하며 돌아가는 걸까요?

언젠가 한 취업포털사이트에서 젊은 남녀 직장인을 상대로 매우 의미심장한 조사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 설문의 내용은 “오늘이 생의 마지막이라면 가장 후회되는 일은 무엇인가?”였습니다. 그 결과 5위는 일 좀 덜할 걸, 4위는 내 감정에 충실히 살 걸, 3위는 도전하며 살 걸, 2위는 사랑하는 사람들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낼 걸, 그리고 1위는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하며 살 걸’이었습니다.

또 호주에 사는 보로니 웨어라는 여성은 호스피스를 하며 경험한 일들을 기록한 저서를 통해 “생의 마지막 순간에 가장 많이 후회하는 5가지”를 이렇게 전했습니다. 다른 사람이 아닌 내가 원하는 삶을 살았더라면, 그렇게 열심히 일하지 않았더라면, 내 감정을 표현할 용기가 있었더라면, 친구들과 계속 연락하고 지냈더라면, 나 자신에게 더 많은 행복을 허락했더라면.

동서고금 남녀노소막론하고 생의 마지막 순간이 되어서야 자신을 회복하는 것이 인간사인가 봅니다. 사실 사는 동안 내 의지 내 행복 내 감정만을 생각하며 산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해 보입니다. 현실은 마치 남들보다 낫게 살기 위해서는 두 배로 일해야 하고, 모든 관계에 잡음을 없애려면 아닌 척 그런 척해야 하며, 필요에 따라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이런저런 이유로 나 아닌 타인으로 살도록 강요하는 것만 같으니까요.

하지만 엄밀히 따져보면 결국 모든 일은 내게서 비롯되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내가 잘살자고 열심히 일했고, 내가 재차 도전할 용기를 내지 않았으며, 내가 먼저 찾아가 보듬을 여념이 없었고, 내가 미처 보고 듣고 말하고 표현하지 못했으며, 나를 들킬까봐 감추다가 외려 나를 잡아먹고 사는 욕심만 살찌우며 살아왔던 것입니다.

그렇다고 후회를 줄일 수 있는 방법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지난날은 배움이고 미래는 허명일 뿐입니다. 오직 지금을, 나를 살아낼 때만이 후회를 줄일 수 있습니다. 비도덕 비양심 악의적이 아니라면 자신을 위해 산다는데 탓할 사람은 세상 어디에도 없습니다. 이런저런 눈치 보며 숨죽이고 있는 나를 끌어내 이상과 현실의 틈을 직시하고 좁히도록 해야 합니다. 보자 듣자 품자 하는 마음으로 순간순간 시시절절 때에 맞게 오는 기회를 잡아 그에 충실해야 합니다.

그리고 가끔은 눈감고 귀 닫고 함구하며 세상과의 나를 살펴야 합니다. 무슨 소리와 향기에 예민해지고 흥분했는지, 어떤 일에 마음이 끌리고 흔들렸는지, 누구로 인해 무엇 때문에 하늘이 무너져 내리고 삶이 아득했는지, 자신의 감정에 얼마만큼 충실했는지. 그래야 내 안에 흐르는 열정이 싱그러울 수 있습니다.
아주 가끔이라도 마음속에 침잠하여 자신을 조율할 수 있어야 합니다. 혹여 내 자신에게 속고 세상사에 끄달리며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보이지 않는 세계와 얼마만큼 소통하며 살고 있는지, 보이는 세계 뒤편에 무엇이 있고 안다고 믿는 것만큼 진화하고 있는지. 그래야 나를 정시(正視)하고 당당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마지막 순간까지 깨어있는 마음으로 순간순간 자족하고 감사하며 나를 살다보면 비록 허접스런 삶일지라도 후회는 하지 않을 것입니다. 잊지 말아야 합니다, 후회를 앞세우고 기회는 늘 온다는 사실을.

“'했더라면'보다 '했지'가 많아지도록 하자. 어떠한 경우라도 비탄과 절망에 빠지지 말자. 끝까지 최선을 다하고 겸허히 평가를 기다리자.” 로버트 브라우닝의 말입니다. 살면서 후회가 없을 수는 없습니다. 설령 오늘이 마지막 순간일지라도 나름 최선을 다해 나를 갈무리했다면 그 다음은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 아닐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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