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신경미 작가의 봉황전 “봉황, 색(色)날개 펴며”

최철원 / 기사승인 : 2019-04-24 13:4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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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주간 = 최철원 기자] 대구 미술협회 주관 대구 아트피아 전시장 단체전에서 봉황화로 큰 호평을 받고 있는 신경미 작가를 만났다. 신경미 작가는 동양의 전통적인 소재인 봉황을 수묵이 아닌 채색으로 녹여 내 오늘 미술계의 눈과 귀를 사로잡은 작가, 그녀와의 짧은 대담을 통해 작가 내면 속의 그림을 면밀히 들여다보았다.

Q. 신경미 작가의 그림이 세간에서는 호평을 받고 있다. 특히 봉황을 주제로 한 그림이 화두가 되고 있는데 봉황이라는 소재를 그림에 등장 시키게 된 이유가 있나.

A. 우연히 비익조에 관한 프로그램을 보는데 반쪽끼리 만나 온전한 한 쌍을 이룬다는 것에 감동을 받았다. 그래서 처음에는 비익조를 소재 삼으려고 했다. 하지만 비익조만으로는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을 온전히 표현하지 못할 것 같았다. 뭔가 크고 더 찬란한 상징이 필요했다. 그래서 찾은 것이 봉황이었다. 봉이 수컷, 황은 암컷을 뜻하며 두 마리가 한 쌍을 이룰 때 봉황으로 지칭되는 것을 알게 된 뒤 봉황을 최고의 소재라고 생각했다. 그림 속 봉황 안에는 남녀가 같이 앉아 있거나 마주보고 있다. 나는 이러한 모습을 통해 행복한 가정을 이야기 하고 싶었다.

Q. 작가의 그림은 100호짜리 캔버스에 그린 그림이 주를 이루고 있다. 일반적으로 커다란 캔버스에 작업을 하게 되면 시간도, 노력도 몇 곱절이 더 들 텐데 이렇게 일반적인 크기의 캔버스가 아닌 100호짜리 캔버스에 작업을 하게 특별한 계기가 있다면?

A. 캔버스 100호짜리로 10개를 그리면 1000호가 된다. 나는 이 1000호의 그림이 서로 연관성이 보이게끔 작업을 하고 있다. 말 그대로 대작이 되는 것이다. 젊었을 때 이러한 대작을 그리고 싶다는 희망사항이 컸던 것 같다. 현재 불혹을 넘어가는 나이인데 내가 여기서 더 늙게 되면 이러한 대작 작업은 할 수 없을 것 같다. 체력이 되고, 의지가 충만할 때 시쳇말로 밥만 먹고 그 외 시간은 그림을 그려야겠다고 마음먹은 것이다.

Q. 작업 시간도 길었겠지만 작가의 무명 시절도 상당히 길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최근에 화명이 대두되기 전 무명일 때 어떠한 생활을 했었는지?

A. 물감을 사면 캔버스가 없고, 캔버스를 사면 물감이 없던 시절이었다. 사실 그림이 1년 전부터 팔리기 시작한 걸 감안하면 그리 오래된 이야기도 아니다. 아이들을 가르치고, 몇 푼 수입을 얻어 물감을 샀다. 그러다가 그림이 안 되면 화가 났다. 최소한의 생활비로 그림에 몰두하기 위해서 삭발을 하고 팔공산에 들어갔다. 6년간 반 비구니 생활을 하며 그림을 그렸다. 가끔 없는 돈으로 식거리를 사려고 밖으로 나왔는데 그럴 때마다 사람이 ‘그림 그리는 미친 여자’라며 손가락질을 했다. 그렇게 바친 세월이 30대, 40대였다. 언젠가 사람들이 내 그림을 알아 줄 날을 기다리며 그 시절을 묵묵히 견뎠다. 그래서 지금, 가끔 내 그림을 보고 울 때도 있다. 그 시절이 스며들어 있는 것 같아서.

 

▲ 대구 미술협회 주관 대구 아트피아 전시장 단체전에서

Q. 작가의 주변 사람들이 작가를 존경해 마지않는 이유를 다시 한 번 알 것 같다. 무명이었지만 모두의 찬사를 받을만한 시간이었다. 이제 구체적인 그림 이야기로 들어가 보자. 작가의 그림은 전혁림과 천경자의 화풍이 들어가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이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A. 중학교 때 그림을 시작했다. 당연히 그 시절, 붓을 들기에 어린 나이였다. 본인만의 무언가 보다는 멋져 보이는 무언가를 찾았다. 그게 천경자 선생님의 작품이었다. 많은 후배 화백들에게 영향을 주었으며 나도 그 중에 한 명이었다. 천경자 선생님의 그림을 너무 좋아해서, 계속해서 습작을 하게 되었다. 그렇게 보다보니 자연스럽게 화풍이 배어져 나온 것 같다. 전혁림 선생님의 그림은 색감이 너무 좋아, 내가 직접적으로 그림을 붓길을 따라가며 익혔던 색감이나 구도가 지금 작품에 어느 정도 영향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지금은 오롯이 나만의 구도나 화풍을 굳혔기에 두 분의 화풍이 언뜻 비칠 수는 있지만 색감이나, 소재 등장 방식, 주 구도에서 다르다고 생각한다.

Q. 작업을 하면서 특이한 경험을 하셨다고 하는데.

A. 봉황 그림을 작업할 때의 일이다. 이 작품 안에서 봉황은 밑바탕부터 하나하나 생성하는 것처럼 작업했다. 봉황이 예천에 흐르는 물을 먹고 산다는 설이 있지 않는가, 그랬기에 나는 물감을 예천이라고 생각하고 흐르듯 붓놀림을 시작 해보자 했다. 그런데 이 그림을 그리는 도중, 봉황 꼬리 아래에서 여인의 기도하는 형상처럼 물감이 흘렀다. 두 손을 모으고 고개를 숙인 모습이 꼬리 그늘이 아니라 숙연한 누군가의 모습 같았다. 순간 어머니가 떠올랐다. 딸이 잘 되라고 낮이든 밤이든, 기도하시던 어머니 말이다. 이제 돌아가셔서 모습을 뵐 수 없기에 그림으로나마 찾아 오신건가 싶은 마음도 들었다. 그래서 그 부분은 그대로 살리기로 했다. 그 이후로도 가끔 작업을 하다보면 의도치 않은 구상이 이루어져 놀랄 때가 있는데 이것이 누간가의 간절함이 아닐까, 생각한다.

Q. 한 여인이 머리에 물고기를 이고 호젓이 앞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이 있다. 양 옆에 봉황이 여인의 앞길을 축복하듯 날개를 펴고 있는데 생동감보다는 오히려 정적인 느낌의 작품이라고 보여 진다. 많은 이들이 작가의 대표작이라고 칭할 만큼 화제가 되고 있는데 이 그림에 대해 설명을 해보자면.

A. 안 그래도 이 그림에 대해 이야기가 분분했다고 들었다. 무명 시절, 날개를 접고 있거나 어두운 빛깔의 봉황을 그렸다면 이 봉황은 오히려 작가로 화명을 올릴 즈음, 그렸기에 활기차고 비상하는 봉황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작가 본인의 모습을 상징하는 것으로 봐도 된다. 또한 물고기는 사랑하는 사람을 형상화한 것이다. 바로 자식들이다. 물고기는 눈을 감지 않는다. 죽을 때마저 눈을 뜨고 죽는다. 이러한 습성을 통해 사랑하는 사람을 항상 바라보고자 하는 마음을 표현했다. 그렇다면 물고기가 바라보는 건 무엇일까? 바로 물고기를 이고 있는 여인이다. 여인은 바로 나의 어머니를 뜻한다. 평생 나를 위해서 숨죽이듯 사시다가, 개인전도 못 보고 돌아가신 어머니를 추상적인 이미지로 표현한 것이다. 여인의 일생을 표현하고 싶었다. 궁극적으로는 어머니의 삶을 말이다.

 

▲ 신경미 작가

Q. 미술계의 러브콜을 받으며 앞으로의 행보가 기대되는 작가 중 한명으로 대두되고 있는데 이를 굳건히 지켜나갈 각오 한마디 한다면.

A. 시간이 흐르고 나도 원숙한 나이가 됐다. 선배님들은 나의 나이가 예술가로서 꽃 같은 나이라고 표현을 한다. 이 꽃 같은 나이에, 꽃 같은 작품을 그린다면 더할 나위 없을 것 같다. 내 작품의 생명이 내 몸의 생명보다 더 오래 갈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고 싶다. 대작을 남기고 죽는 것, 어찌 보면 지금의 작업 목표이기도 하다. 이것은 내가 하늘에게 받은 그림이라는 달란트를 헛되게 하지 않겠다는 노력이며 그림으로 돌려주고 가야 한다는 의무이다. 하루에도 수십 번 초심을 잃지 않는 작가가 되자고 되뇌인다. 초심을 지키고 의무를 아는 한, 나는 더 좋은 작품으로 사람들을 찾아가는 작가가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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