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연재소설 ‘혈맥(血脈)’의 박우목 작가(상편)

소정현 기자 / 기사승인 : 2021-08-13 15:1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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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멸망기 ‘일본정착 선진문명’ 생생 묘사
‘임진왜란 식민통치’ 역사 해빙무드 어렵게

현재는 양국관계 ‘상호균형’ 진통적 전환기
한일 관계 상생모델은 ‘EU같이 경제공동체’
▲ ‘혈맥(血脈)’의 박우목 작가
● 언론사 기자를 역임했으며, 기업체를 운영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 작가의 본명은 박종형(朴鐘衡)으로 당년 85세로 조선일보사 공채4기 기자로 사회에 첫발을 내디뎠는데, 가세가 갑자기 기울어 기자 박봉으로는 가족부양을 할 수가 없어 사퇴하고, 모교 부속고등학교 교사로 5년간 근무하였습니다.

다시 장래성과 대우가 월등히 나은 기업으로 옮겨 전문경영인으로 일하다 70대 중반에 퇴직하였습니다. 그 무렵 6년간 대학에 출강하여 창업경영을 강의했고, 모 전자신문에 새로운 산문장르인 기업수필 1백여 편을 연재하였습니다.

● 모닝선데이에 절찬리 연재중인 소설 혈맥(血脈)의 배경과 스토리에 궁금해 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 소설 혈맥을 쓰게 된 동기는 1970년 국제세미나에 한국 민간대표로 참석 후 귀국길에 들른 일본에서 깊은 충격을 받아 일본에 대한 관심에서 촉발되었습니다. 우선, 밀양박씨(密陽朴氏) 규정공파(糾正公派) 대동보(大同譜)에 적힌 가문애사(家門哀史)를 연구하게 됩니다. 참조로 대동보는 동계혈족의 분파된 파계를 한데 모아 대동하여 집대성한 족보를 말합니다.

임진왜란 당시 선조 임금의 피난을 곁에서 모셨던 필자의 선조 한 분이 영의정이신데, 피난처에서 돌아가셨습니다. 같이 자리를 지켰던 조카도 거기서 죽었으며, 또 그분의 조카 역시 충북 청주성(城) 북문에서 의병대장으로 싸우다 약관의 나이로 전사했습니다. 후에 임금이 한 가문에서 셋이 순절했으니 역사에 드문 일이라 순국삼절로 기리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말씀드린 선대의 13대 후손되는 필자의 아버지 3형제는 일제 치하를 생생히 목도하였고, 필자 또한 한일합자 기업의 대표이사로 5년간을 일하면서 일본을 자주 드나들며 일본의 문물을 살피고 배웠습니다. 이런 계기로 인해 소설을 통해 韓日혈연관계의 기초가 되는 ‘한일동조일국론’(韓日同祖一國論)을 살피게 되었고, 그 맥락에서 소설 ‘혈맥(血脈)’을 집필하게 된 것입니다.

▲ 일본의 선진문명 구축의 토대되는 백제왕국
● 연재소설 혈맥(血脈)의 개괄적 스토리는 백제 왕조의 멸망기에 한국의 선진문명을 미개화 일본에 접목시켜 부흥시킨 것으로 알고 있는데, 3부로 구성된 소설 중 1부의 줄거리는?

▼ 소설은 3부로 구성돼 있습니다. 1부는 일본으로 건너간 도래인(渡來人) 가운데 천황혈족이 된 비화가야 왕자 김성광이 있는데, 그는 왕자시절 백제로 건너가 자립, 출세하여 사택가문을 이루고 끝내 천황가문의 일족이 되었습니다. 1부는 그 일대기를 그린 이야기입니다.

필자는 1부에서 한일 간 혈연관계가 엄연한 역사적 사실임을 증명하려고 시도했으며, 일본이라는 국명이 백제가 망한 10년 후에야 왜에서 일본으로 개명된 사실을 들어 왜국에 있던 지방통치기관인 22개의 담로가 백제의 통치기관이라 하는 것을 규명하려 하였습니다. 백제의 멸망 이전인 670년 까지는 왜국이 실제적으로 백제의 분국(分國)이었음을 실증하여 한일이 형제지국임을 밝혀낸 것입니다.

● 제2부 스토리는 현대 일본으로 좌표가 이동된다. 매우 흥미진진하게 다가오는데?

▼ 제2부는 이 소설의 주인공들이 등장하여 애원(哀怨)의 사건에 휘말리게 되는 스토리를 담고 있습니다. 일본 측에서는 백제가 망하면서 일본과 국내 승지(勝地, 옛날 피난처)로 피난시킨 금괴의 행방을 찾느라 암투하는 애기를 긴박감 있게 그리고 있습니다.

주인공 김강민이 당한 테러 때문에 금괴의 행방이 밝혀졌고, 사랑하는 사이인 여주인공 사치코는 김강민과 오하라 가문의 한 혈족임이 밝혀지게 됩니다.

그들 부부의 꿈은 원대해서 그 발견된 금괴를 처분해서 한일 양국이 한 형제국임을 증명하는데 쓸 것이며, 한 조상의 나라면 한일 양국의 국가연합 같은 관계를 지향하는 비전을 실감나게 묘사했습니다.

김강민이 테러를 당해 몸을 숨겨 치료를 받던 가라 카에 신사의 ‘미호 신녀’는 김강민을 신이 맺어 준 운명으로 받아드려 그를 약물에 취하게 만들어 몸을 섞는데 성공합니다. 그러나 사치코와 그가 비밀리에 결혼을 하자 질투심에 사치코를 살해하려고 음모를 꾸밉니다.

그리고 신녀 미호는 오하라가문의 유물저장소에 보관중인 기록들과 사료를 연구하여 김강민과 사치코가 백제 사택가문의 종손과 지손(支孫)임을 알게 됩니다. 도청으로 그 모든 사실을 알게 된 미호 신녀는 정부 교스케와 모의하여 사치코를 죽여서라도 백제보물의 행방을 알아내기로 책략을 씁니다.

그런 음모를 알아챈 신사의 다카미야 궁사는 양녀인 미호 신녀를 산장으로 불러 독약을 마시고 함께 자살했습니다. 그리고 신사는 사치코 가문의 절이라 궁사 자리를 계승해야 했음으로 이들 부부는 생이별 하게 됩니다.

▲ 백제와 일본은 삼국의 어느 국가보다 밀접히 교류했다. capture hongikf.org

● 제3부 역시 음모와 대립의 극적 반전의 묘미가 상당하다.

▼ 제3부는 백제의 보물이 김강민에 의해 발견되고 그것을 한일 양국의 국가연합을 실현하는 일에 쓰기로 결심하지만 비밀의 그림자에 묻습니다. 한편, 유키코는 여명대사의 도움으로 해산을 하고 언니 사치코가 궁사로 있는 신사에다 업둥이로 들여보내면서 다시 태양의 딸로 돌아갑니다.

그러나 유키코는 도쿠야마가 비밀조직인 천군을 동원, 백제유물 저장고를 습격해 왕의 유언장을 탈취하려는 음모를 알아채고 김강민의 위태로운 목숨을 구하기로 결심합니다. 죽을 각오로 도쿠야마에게 그 계획을 자신이 지휘하겠다고 나선 것입니다.

유언장 탈취는 인명의 사상이 없이 끝났는데, 일본이 가져간 유언장은 위조품이었습니다. 유키코는 언젠가 그 위조사실이 탄로 나면 자결로 책임을 지리라 단호히 결심하게 됩니다.

해마다 야쓰시로에서 멀지 않은 구마 강 하구로 화려한 휘장으로 감싼 배가 들어오면 히간(彼岸) 축제가 시작됩니다. 일본이 나라가 없던 시절, 가야나라 김수로왕의 따님인 묘견공주가 구마강으로 들어와 일본 최초의 왕국인 ‘야마다이 나라’를 세웠는데, 가을이면 그것을 기려 축제를 열었습니다. 그 축제기간에 유키코는 태양의 딸로 히미코여왕이 되어 영접사로 강 하구로 가게 됩니다.

김강민은 축제선을 이용해 금괴를 실어갈 계획이었고, 그 음모는 아슬아슬하게 성공하는 듯 했으나 도쿠야마 측에 들키고 말았습니다. 사태는 심각한 국면으로 접어들려 했습니다. 사랑하는 정인과 사랑스러운 아들을 위해 한 여인이 희생의 길잡이로 나섰으니 유키코였습니다. 금에 미쳐 그걸 손에 넣으면 무슨 짓을 할지 몰라 그들을 지옥으로 안내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제1부에서 제3부까지의 대략의 줄거리는 이렇습니다.

▲ 2019년 4월 퇴임한 아키히토(明仁) 일왕은 2001년 생일 기자회견에서 “간무(桓武) 천황(일왕)의 생모가 백제 무령왕의 자손”이라고 밝힌 바 있다.

● 현재 한일 관계는 하계의 폭염만큼이나 뜨거운 관계가 아닌 극도의 냉각기인 혹한기 겨울의 동토의 왕국이다. 거시적으로 분석하여 달라.

▼ 한일관계가 경색국면으로 치우치는 현상은 역사적으로 반복되어 왔다는 사실(史實)을 전제해야 합니다. 그 정도로 한일 양국은 감정의 골이 깊고, 상처는 난치병에 가깝습니다.

 

그것은 선비의 나라요 조상의 나라로 언어‧문화‧혈연 등 인적‧물적토대인 ‘人(히노)과 物(모노)의 본체와 뿌리가 한반도에 있음에도 일본의 배은망덕한 임진왜란으로 한반도를 쑥대밭으로 유린함으로 시작되었습니다.

동시에 임란은 슬프게도 조선이 명나라의 신하를 자처하는 ‘모화사상’(慕華思想, 중국을 어버이처럼 여기는 사상)이 조선 백성들 사상에 뿌리를 내리는 계기가 되었던 흑역사의 단초가 되었습니다.

더욱이 7년간의 전쟁이 끝났을 때 전화(戰禍)로 인구는 아녀자만 살아남아 농사를 지을 수 없어 전쟁보다 무서운 기아라는 아귀가 가련한 생존자를 빠져나올 수 없는 생지옥으로 강하게 밀어 넣은 것입니다. 이처럼, 어찌 조선인 가슴에 원한의 피멍이 들지 않았겠습니까? 

 

▲ 일제 식민지 위안부 문제는 우리 민족에게 씻을 수 없는 상흔을 남겼다.

● 임진왜란 이어 일제식민 통치가 반일 정서를 극도로 악화시킨 것 같다.

▼ 조선이 임란 이후 3백 년간을 피나는 노력으로 겨우 먹고살 게 되었을 때 ‘화혼양재’(和魂洋才), 즉 ‘정신은 일본정신을 고수하되 기술은 서양의 선진기술을 배운다’는 모토 아래 전개된 개화운동으로 부강해진 일본은 천인공노할 수단과 간교하기 이를 데 없는 방법으로 조선을 강제로 합방, 식민지로 삼았으니 이것이 바로 1910년 체결한 을사늑약(乙巳條約)입니다.

제2차 한일협약으로도 불리는 이 조약은 1905년 11월 17일 대한제국의 외부대신(外部大臣) 박제순과 일본 제국의 주한 공사 ‘하야시 곤스케’에 의해 체결되었습니다.

이에 앞서 을미사변(乙未事變)은 1895년 10월 8일 경복궁(景福宮) 건청궁 옥호루 곤녕합에서 명성황후 민씨가 조선 주재 일본 공사 미우라 고로(三浦梧樓)의 지휘 아래 일본군 한성 수비대 미야모토 다케타로(宮本竹太郞) 등에게 암살된 사건입니다.

그날 한 무리의 사무라이들이 조선왕궁을 범궐하여 그 더러운 맨발로 궐내곳곳을 짓밟고 다니며 닥치는 대로 죽이더니 급기야 국모이신 민비 왕후를 찾아내어 난도질로 시해하니 산천초목이 그 무도함에 치를 떨고 통분하여 매국노들에 향한 저주와 탄핵의 원성이 하늘에 사무치고 무도하고 사악한 일제의 마수에 대한 증오심이 조선인 가슴속에 깊이 불도장으로 찍힌 것입니다. 어찌 그 아픔과 그렇게 시작된 36년간의 종살이의 한에서 반일감정이 급상승하지 않겠습니까?

▲ 제2차 세계대전 패전국 일본은 6.25특수 등 한국 덕분에 번영을 구가했지만 현재까지도 관계개선에 전향적으로 나서는데 매우 미온적이다.

● 해방 이후 한일 관계의 현대사를 단계별로 분석하여 달라.

▼ 우리는 한일관계의 현대사를 진실하게 이해함에 있어 반일 감정이나 일본에 대한 불신의 역사적 배경이나 사건을 감안해야 합니다. 한일관계의 전환계기를 중심으로 한 구분을 하면 이런 특징을 나타냅니다. 먼저 1945~50년의 제1기와 1950~60년의 제2기를 말씀드립니다.

제1기는 2차 세계대전의 종전으로 한국은 광복, 일본은 패전국으로 모든 분야에서 새 출발을 한 시대입니다. 새로운 정체(政體)인 민주공화국으로 출발했는데, 양국은 발등에 떨어진 불똥(한국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일본은 패전의 후유증 수습) 먼저 끄느라 양국 간의 허다한 미결 청산과제는 보류된 상태였습니다. 따라서 외교적 마찰이나 정치적 갈등이 빚어지지 않았던 것입니다.

한국은 승전국인 미국한테 업힌 꼴이라 38도선을 그어 남북한으로 분단국을 만들려는 원통한 조치를 막지 못했고 건국과 시급한 생계문제를 전적으로 미국에 의존하게 되었습니다. 그러한 허술한 안보는 결국 한국전쟁의 불씨가 되었습니다.

제2기는 생존투쟁기와 부흥기입니다. 1950년 소련의 지원을 받은 북한군이 남침함으로써 한반도는 민주주의 진영과 공산주의 진영 간의 전장으로 확전되었습니다. 군사력에 있어 열세인 남한정부는 실로 나라의 운명이 백척간두에 선 형국으로 위태로웠습니다.

한편, 패전으로 마비된 산업시설을 복구하고 다시 생산대국으로 웅비하려던 일본은 천우신조로 한반도 전장에 공급할 전쟁군수물자의 생산을 의뢰 받았습니다. 그로써 일본은 엄청난 특수를 누렸으며 놀랄 정도로 빠르게 경제부흥의 가도를 달려갔습니다.

한국의 대일 경제의존도나 경제력 차이는 더욱 심화되었고 무역적자는 해마다 불어났습니다. 일본이 주요 생산기자재를 공급하지 않으면 한국은 당장 수출품 생산에 차질을 빚을 것이 자명했기에 한국에 사죄를 하고 또 해도 모자랄 판에 사죄를 제대로 한 번도 하지 않았습니다.

미국의 방관적 자세도 문제였습니다. 한국은 국제정치에서 힘이 약한 국가의 서러움이 뼈에 사무치는 고통을 맛보게 된 것입니다. 한국인의 국민정서에 각인된 반일반미 감정이 있다면 이러한 강자의 논리 때문일 것입니다.

이어 경제개발의 막이 오르자 한국인의 명민한 두뇌와 성실한 노력이 결집되어 한강의 기적을 낳았으니 세계가 놀라고 경탄했습니다. 일본은 비로소 한국을 존중하기 시작했습니다.

▲ 일본 언론 역시 한일 관계의 해법을 속시원히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 1960~1970년대의 제3기는 외형상 한일관계 정상화의 단계에 진입하는데?

▼ 세계를 찬탄하게 만든 한국의 경제발전과 한일관계의 정상화(1960~1970)에는 공과 논란이 분분한 박정희 장군이 있습니다. 그 때 한국의 경제는 북한에 뒤질 정도로 취약했으며, 특히 미국과 우방국들이 참전한 6.25 동란의 결과는 경제가 엉망이서서 국가 장래가 암담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1965년 6월에 한일기본조약을 체결, 국교정상화를 했으며 배상금 명목으로 8억 달러를 받아 포스코건설 등 경제개발 사업에 투입했습니다. 이 시기는 일본의 대한 태도가 상당히 유연해지고 우방국으로 대접하는 시기이기도 합니다. 그런 맥락의 연장에서 시간적 간격을 뛰어넘어 88올림픽을 한일이 공동개최하게 된 것입니다.

▲ 한일관계는 상호 호혜의 대등한 관점에서 균형을 이루어야 실타래가 풀일 것이다. capture youtube.com/D19vcm8lGKA

그럼에도 우리 국민들 사이에 흐르는 반일감정의 순화나 불식은 여전합니다. 만일 양국이 진정으로 한 조상의 후예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유럽연합(EU)처럼, 국가연합의 길을 간다면 아마도 세계 최강의 강국이 될 것이며 그로서 세계평화와 복지 증진에 크게 이바지 할 것 입니다.그런 세상을 소망하는 새천년의 유토피아를 혈맥(血脈) 소설에 그린 것입니다.(하편에서 계속됩니다.) [일요주간 = 소정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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