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냄새 나는 글을 쓰고 있는 소설가 황천우가 기존 두 권의 내용을 보완, 수정하여 한 권으로 묶은 ‘여제 정희왕후 개정판’을 내놓았다. 그가 역사소설에 열정을 쏟는 이유는 바로 역사에 대한 바른 인식과 왜곡된 역사 청산이라는 의지와 소신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정희왕후는 ‘KBS 한국사전’에서도 다룬 바 있을 정도로 한 시대를 풍미했으면서도 결코 국가와 권력을 상대로 자신의 안일한 틀만을 추구하지 않았던, 시대를 앞섰던 여인이요 위민을 우선하며 조선의 기반을 확고히 했던 진정한 정치가였다.
역사의 변방으로 소외되었던 여성임에도 21세기에 재조명된 역사적 인물 중에 단연 최고의 여성이라고 해도 결코 지나침이 없다.
이념과 계파를 따지며 좌충우돌하는 요즘의 세태와는 달리 불교를 신봉하면서도 정치에는 중도와 정도를 알고 있었던 여인. 당대의 세도가인 한명회와 신숙주 등이 부복할 정도로 뚜렷한 정치철학과 카리스마가 넘쳤던 여인. 보위에 앉은 세조가 평생을 사랑했던 여인. 채 완성되지 않은 조선을 민생을 우선하며 확고한 반석 위에 세운 탁월한 정치력을 발휘했던 여인. 그러나 어느 한 시점, 조용히 자신의 자리에서 물러나 역사 속으로 스스로 걸어 들어간 여인.
‘물러설 때와 나설 때’를 아는 ‘아름다운 뒷모습의 영웅’을 ‘여제 정희왕후’를 통해서 만날 수 있다.
아울러 인간의 스승인 역사를 통해 그 환한 빛 뒤에 가려진 진정한 역사적 인물들을 발굴 재조명하는 작업을 소명으로 생각하는 도서출판 멍석의 제 1호 야심작인 ‘여제 정희왕후’는 오직 나라와 백성만을 위해 무한한 정치력을 발휘한 여인이요, 어머니요, 정치가였던 정희왕후를 통해 국민이 진정 주인이 되는 세상을 향한 첫발이라고 할 수 있다. ‘여제 정희왕후’는 철저하게 실록과 관련 사적을 토대로만 구성한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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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든 눈을 떠서 시원한 물로 갈증을 풀어야 했다. 그러나 마치 눈꺼풀이 견고하게 달라붙어 있는 듯 눈 뜨는 일이 쉽지 않았다.
눈에 온 신경을 집중하자 미세하게 통증이 몰려왔다. 그를 참아내며 온힘을 다해 눈을 뜨려고 했다. 그 순간 자신을 부르는 여러 사람의 목소리가 아련히 들려왔다. 단순히 부르는 소리가 아니라 절규에 가까운 부르짖음이었다.
또한 누군가가 자꾸 자신의 몸을 만지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어떤 이는 이마를 쓰다듬고 있었고, 또 다른 사람은 손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손길이 부드럽게 느껴지는 것으로 보아 자신과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사람들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이제는 조갈증이 아니라 그 보다 더 심한 호기심이 찾아들었다. 도대체 절규에 가까운 소리는 무엇이고 누가 자신의 몸을 그리도 부드럽게 만지고 있는지 확인해야 했다.
호기심에 서서히 눈이 떠지고 있었다.
"대왕대비 마마!"
"마마!"
터진 둑에서 물이 쏟아져 흐르듯 한꺼번에 다양한 목소리들이 귓전을 때렸고 또 그 소리만큼이나 많은 사람들의 모습이 희미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다시 한 번 눈에 힘을 집중했다.
좁지 않은 방안이 사람들로 가득 들어차 있었다. 눈을 돌려 그들의 얼굴과 방안을 둘러보았다. 창호지로 바른 창을 뚫고 희미하게 햇빛이 스며들고 있었다.
"대왕대비 마마!"
"마마!"
이제는 정신도 차려야 할 듯했다.
"대왕대비 마마, 정신이 드시옵니까?"
바로 자신의 곁에 앉아있는 사람으로부터 근심으로 가득 찬 말소리가 들려왔다.
"으 음, 최 상궁. 나 좀 부축해 주게."
힘 있게 말한다고 했는데 상대방에게 전달되지 않은 듯했다.
"마마! 그냥 편히 누워계십시오."
최 상궁의 반대편에 앉아 자신의 이마를 만지며 근심스러운 표정을 하고 있던 며느리, 인수대비가 입을 열었다.
"마마! 그리하시지요."
인수대비 옆에 앉아있는 손자, 성종이 손을 만지며 거들었다.
"아니야. 이제는 일어나야겠으니 부축 좀 해 주게."
최 상궁이 그제야 알아들은 듯했다. 손으로 정희왕후의 등을 바치고 천천히 일으켜 조심스럽게 베개에 기대도록 했다.
"최 상궁, 물……."
말이 끝나기도 전에 최 상궁이 그 말을 이해하고는 급히 주전자에 있는 물을 하얀 탕기에 따라 조심스럽게 정희왕후의 입으로 흘려 내리기 시작했다. 방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그 모습을 숨죽이며 지켜보고 있었다.
잠시 후 정희왕후가 길게 한숨을 토해냈다.
"마마, 이제 정신이 드시옵니까?"
아직도 자신의 손을 잡고 있는 성종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주상, 한창 바쁠 터인데……."
"마마!"
정희왕후를 부르는 인수대비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대비, 아니 나의 며느리……."
미처 끝맺지 못한 그 말이 마치 신호라도 된 듯 인수대비가 정희왕후 앞으로 엎어지며 흐느끼기 시작했다. 흔들리고 있는 인수대비의 몸을 힘겹게 어루만지며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바로 앞에는 낯익은 사람들이 근심스런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었고 저만치 문가에는 두 명의 의관이 조금은 긴장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최 상궁!"
"예, 대왕대비 마마!"
최 상궁을 부르고 다시 한 번 숨을 고른 다음 말을 이었다.
"의덕왕대비는 오시지 않았는가?"
의덕왕대비라는 말에 최상궁의 얼굴이 곤혹스럽게 변하더니 인수대비와 성종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순간적으로 성종의 미간이 살짝 찌그러졌다. 자신의 할아버지인 세조에 의해 비명에 돌아가신 당숙 노산군의 부인 되는 송 씨 부인을 지칭했기 때문이었다.
"마마! 송 씨 부인은 지금 별채에서 기다리고 있사옵니다."
"송 씨 부인이라."
중얼거리듯 말을 마친 정희왕후가 성종에게 시선을 돌렸다.
"주상! 이 할머니가 주상의 당숙모, 의덕왕대비를 불렀다오. 반드시 마무리를 하고 넘어가야 할 듯해서 말이에요. 그리해도 되겠지요?"
"마마! 마마께서 원하신다면 무엇이 문제겠습니까, 그리하시지요."
성종 대신 인수 대비가 입을 열었다.
"할마마마, 그리하시지요."
성종이 어머니 인수대비의 말에 힘을 실었다.
"그래요. 이 할머니가 죽기 전에 반드시 풀고 가야할 문제가 있어 특별히 불렀다오. 최 상궁은 왕대비를 속히 모시도록 하게."
최 상궁이 선뜻 자리를 뜨지 못하고 인수대비와 성종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최 상궁은 어서 마마의 말씀을 이행하도록 하게!"
인수대비의 지엄한 분부가 떨어지기 무섭게 최 상궁이 급히 일어섰다.
"주상, 그리고 대비!"
"예, 마마."
둘이 약속이나 한 듯 동시에 답을 했다.
"나에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어요. 그래서 내가 먼 길 떠나기 전에 오해가 있다면 반드시 풀었으면 해요. 의덕왕대비는 주상의 당숙모요 대비의 아우가 아니오."
"주상! 대왕대비 마마의 분부대로 하시지요."
"알겠습니다, 어마마마."
성종이 할머니와 어머니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한 듯 표정이 한결 부드러워졌다.
"대왕대비 마마! 절대로 소자 곁을 떠나시면 아니 되옵니다."
정희왕후가 힘들게 손을 뻗어 성종의 손을 잡고는 얼굴을 바라보았다.
"주상! 주상은 이 할머니가 주상 곁을 떠난다고 생각하시오?"
"하오시면."
"나는 가도 우리 주상이 이렇게 늠름하게 남아 있지 않습니까.”
성종이 정희왕후의 말을 헤아리는 듯 말이 없었다.
"주상! 세상은 돌고 도는 것이랍니다. 조선 왕조를 창건하신 태조대왕님도 가시고 또 할아버지이신 세조임금님도 가셨지요."
힘에 겨운지 잠시 길게 숨을 내쉬고는 말을 이었다.
"이 나라에 이처럼 늠름한 성군이 있으니 이는 바로 선조들의 은덕이요 결정판이 아니겠소? 그러니 이 할미는 털끝만큼의 미련도 없답니다."
어느덧 성종의 얼굴에 잔잔한 미소가 흐르고 있었다.
"알겠습니다, 할마마마. 그럼 소자는 잠시 자리를 비켜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말을 마친 성종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마, 저도 비켜드릴까요?"
"대비는 함께 자리하도록 합시다. 주상, 송구스럽소."
자리에서 일어선 성종이 정희왕후에게 미소를 보이고 방을 나섰다.
"대비! 우리 주상이 참으로 대견스럽군요."
"이 모두가 마마의 은덕이옵니다."
"아니오, 대비의 공이지요. 대비가 그만큼 고생했기에 주상이 저리 빛을 발하는 게지요."
"어마마마!"
인수대비가 다시 정희왕후 앞으로 무너져 내리자 정희왕후가 인수대비의 등을 천천히 쓸어내렸다.
"그 모진 날들의 눈물겨운 일들을 어찌 말로 다할 수 있겠느냐!"
인수대비가 흐느끼자 방안 사람들이 시선을 어느 곳에 두어야 할 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그 순간 문 밖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마마! 송 씨 부인 대령하였습니다."
인수대비가 급히 몸을 일으켜 얼굴을 닦고 옷매무시를 단정히 했다.
"어서 모시도록 하세요."
문이 열리더니 아무런 표정도 없는데다 창백해 보이는 중년의 여인이 방으로 들어섰다. 순간 모든 사람의 시선이 그리로 집중되었다.
하얀 옷을 입은 사십 중반의 여인이 곧바로 정희왕후에게 다가가다 한 지점에서 멈추어 서더니 큰절을 올리기 시작했다. 정희왕후가 몸을 일으키려 하였으나 마음뿐이었다.
"대왕대비 마마! 소인 부름 받잡고 왔습니다."
말투가 냉정하게 들릴 정도로 차분했다.
"왕대비, 어서 오세요."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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