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유럽서 대거이주 차별딛고 떠오른 샛별”

소정현 / 기사승인 : 2013-05-30 18:16: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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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셜-2> 美國 대륙의 유대인-정착기 독일계와 동유럽계 출신이 미국 유대인 주류 형성
이주초기 온갖 차별에도 공직과 시의원 선출 쾌거

역대 노벨상 수상자 22.3% 차지 다섯명당 한명꼴
특히 ‘노벨 경제학상’ 무려 42% 점유 위상 독보적

美 동부 8개 명문대 아이비리그 교수진 무려 40%
美 연방대법관중 3명…전역에 변호사 14만명 20%

[일요주간=소정현 기자]

● 다수가 美國 東部 ‘뉴욕을 거점’으로 정착

유대인들은 세계 전역에서 활기차게 살고 있다. 이들을 깊이 이해하려면 이스라엘의 국가 개념보다는 유대인이라는 정체성을 통해 포괄하여 접근해야 한다. 유대인이라는 심층적 의미는 종교적, 문화적, 인종적 정체성 모두를 수용하고 있는 것이며, 어느 하나도 분리할 수 없는 총체적 개념이기 때문이다.

미국에 뿌리를 탄탄하게 내린 유대인의 신대륙 이주와 정착은 갖은 우여곡절에도 불구하고 경이로움 그 자체이다.

19세기 중반 미국으로 건너온 30여만 명의 독일계 유대인과 19세기말~20세기 초 미국에 정착한 200만 명 이상의 동(東)유럽계 유대인이 미국 유대인의 중심 세력을 형성하여 나갔다.

미국에 스타트를 끊은 유대인은 가톨릭 국가인 스페인과 포르투갈에서 추방된 자들이다. 이들은 1654년에 브라질을 경유하여 처음으로 지금의 뉴욕 지역에 도착했다.

1654년 9월 프랑스 선적 '세인트 찰스'(St. Charles)호를 타고 뉴욕의 맨해튼 섬 '뉴암스테르담' 부두에 나타났으나 이곳을 관할하던 네덜란드 총독이 23명의 유대인들의 하선을 불허했다.

뉴암스테르담 총독은 그가 소속하고 있던 네덜란드 서인도회사(西印度會社, Dutch West India Company)의 유대인 주주들로부터 압력을 받고서야 이들 23명 유대인들의 하선을 허용한다.

이렇게 뉴욕의 맨해튼에 도착한 23명이 미국 최초의 유대인 이주 역사를 쓰게 된 것이다. 10년 후인1664년 영국 찰스 2세가 함대를 보내 뉴암스테르담을 점령했다. 찰스 2세는 도시 명을 그의 형 요크공작에게 경의를 표하는 뜻에서 뉴요크로 바꾸었다.

1775년부터 1783년까지 치러진 미 독립전쟁(Independent War)에서 유대인들은 총을 들고 자발 참여한다. 그러나 이 시기 미국 내의 유대인 총인구는 고작 3천 명에 불과했다.

이들 초기 이주자 가운데는 기독교로 개종하고 상류 계급과 혼인하는 등 각고의 노력을 거쳐 미국 주류 지배 계급인 WASP(백인, 앵글로색슨, 신교도인 프로테스탄트)에 포함된 이들도 있었다.

미국에서 유대인의 차별과 규제는 그리 간단한 것이 아니었다. 노스캐롤라니아 주에서는 신교도인 프로테스탄트만이 공직에 오를 수 있었는데, 1809년 '야곱 헨리'(Jacob Henry)라는 유대인이 공직에 진출하는 쾌거를 이루었다.

메릴랜드 주에서도 비(非)기독교인이 관직에 오르거나 법률에 종사하는 것을 금하였으나 '솔로몬 에팅'(Solomon Etting)의 끈질긴 노력 끝에 1826년 볼티모어(Baltimore) 시의원으로 선출되었다.

여기에서 주목을 끄는 하나의 실례는 유대인으로서 처음으로 외교관의 자리에 오른 ‘모르데카이 노아'(mordecai manuel noah)를 제5대 대통령 제임스 먼로(James Monroe, 1817~1825)가 주 튀니지 미국 영사 자리에서 해임한 일이다. 그 이유는 ‘영사 업무를 집행하는 데, 귀하가 믿는 종교가 장애가 되고 있다’는 것이었다.

초기 아메리카 대륙의 유대인 규모는 매우 작았다. 1820년에 미국에는 겨우 4천명의 유대인들이 거주하였는데, 13개주 가운데 7개주만이 이들을 정치적으로 승인하고 있었다. 1848년에는 5만 명에 불과한 유대인의 인구는 1861년~1865년에 미합중국의 북부와 남부가 벌인 내전(內戰)인 남북전쟁(南北戰爭) 직전에는 15만 명으로 늘었다. 1860년대 중반 넘어서는 20만 명 가까이 급증했다.

1820년대부터 1870년대까지는 독일에서 유대인들이 몰려왔는데, 초기의 스페인계 유대인 사회에 독일계 유대인이 합류하면서 유대인 인구는 눈에 띄게 증가하기 시작했다. 독일에서 1848년 일어난 3월 혁명((유럽전역에 확산된 민주화 시위) 패배로 탈출한 사람들이 그 핵심이었다.

이들은 스페인, 포르투갈에서 온 유대인들의 멸시를 물리치면서 새로운 곳을 분주하게 개척하기 시작했다. 면화, 금광, 철도, 토지 등에 투자했고 월스트리트에도 본격 진출했다.

● 19세기말-20세기 초반에 ‘이주 봇물 이뤄’
1881년 점점 강해지는 압력이 러시아 유대인 사회에 가해지자 유대인들의 탈출 러시가 줄을 이었다. 1881년은 1942년 스페인의 유대인의 추방과 1648년 이후 가장 중요한 해가 되었다.

먼저, 1648년의 상황을 약술한다. 17세기 중엽은 스페인에서 쫓겨나 각지에 흩어진 유대인들이 동유럽에서 새로운 난국을 맞이하고 있었던 때이다. 1648년에는 우크라이나의 코작(Cossacks)에서 유대인 학살이 일어났다. 그 해부터 1656년까지 죽은 유대인들은 10만 명이 넘는다. 이에 유대인 난민의 무리가 생겼고 그 일부가 미국으로 건너왔다.

1881년 3월 1일 제정 러시아에서 알렉산드르 2세 암살 직후에 발생한 유대인의 대탄압을 일컫는 ‘포그롬’(pogrom)의 파괴와 약탈, 살육을 피해 매년 평균 5만-6만 정도가 러시아를 이탈한다.

이어 10년 후인 1891년부터 1892년 사이에 약 2만 명의 유대인이 모스크바에서 추방된 가운데, 1891년에 11만 명의 유대인이, 1892년에는 13만7천명이 러시아를 떠났다. 이들은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Empire of Austria-Hungary, 1867∼1918), 영국, 독일, 팔레스타인, 특히 미국으로 이주해 갔다.

1905년-1906년 러시아에서 대학살 기간에만 20만 명 이상의 유대인들이 떠났다. 1905년 1월 22일 발생한 혁명(피의 일요일 사건)이 좌절된 후, 제정 러시아에는 유대인 학살과 탄압의 광풍이 불었다.

발단은 불평등 사회체제에 억눌린 러시아 민중들은 차르 니콜라이 2세 초상화와 노동자들 요구를 적은 청원서를 손에 들고 비폭력시위를 벌였는데, 제정 러시아 정부는 이를 유혈 진압하여 사망자 500∼600명, 부상자 수천 명이 발생 된 대형 참사였다.

그러한 탈출은 러시아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는데, 1881-1914년 사이에는 35만 명 이상의 유대인들이 갈리치아(Galicia, 1772년부터 오스트리아의 영토이었다가 1918년 우크라이나와 폴란드로 분할)를 떠났고, 더 많은 유대인들이 자신들을 압제했던 루마니아를 등졌다.

미국에서 유대인 인구는 1900년을 넘어서면서 100만 명을 돌파한다.이전 20년간 미국의 총 인구가 1.5배 증가한 데 반해 유대인 인구는 4.4배가 증가했다. 이들은 주로 동유럽에서 넘어왔다. 유럽 거주 유대인들은 1870년대부터 1914년까지 2백4만 명 정도가 미국으로 이주했다.

서유럽 유대인들은 反유대주의를 피해, 동부 유대인들은 절대 빈곤을 타파하려고 대서양을 건너 신대륙에서 둥지를 틀게 된 것이다. 숫자가 가파르게 증가하자 미국은 1924년 이민법을 제정하여 동유럽 유대인들의 이민을 막았다.

이 시기에 미국 사회의 주류이던 기독교인들은 이들의 학교의 입학과 취업을 규제하기도 했다. 이런 처사는 제2차 세계대전 후 법으로 금지되었다. 폐쇄의 문이 다시 열린 시기는 제2차 세계대전을 촉발시킨 독일과 오스트리아로부터 나치의 박해를 피해 25만 명의 유대인이 미국으로 건너왔을 때이다.

약술하면, 유대인들의 시기별 이주 특징은 첫 번째 독일 거주 유대인들로서 1840년~1870년까지 5만 명이 이주하고, 둘째로 동구 출신 유대인들이 1870년~1924년까지 폴란드, 리투아니아, 루마니아, 헝가리 유대인들의 핍박과 빈곤 탈출에서 기인한다.

세 번째로는 중부 유럽 유대인들이 1925년부터 1943년까지 25만 명이 미국으로 이주했다. 제2차 세계대전 후인 1948년~1953년까지는 20만 명이 미국으로 이주했는데, 이들 대부분 뉴욕에 상륙하여 주변에 정착했다.

마지막 유대인 이민의 물결은 1991년 구소련에서 철의 장막이 붕괴된 이후 러시아에서만 유대인 1백만 명이 미국으로, 그리고 1백만 명이 이스라엘로 이주하면서 성사되었다.

뉴욕의 ‘엘리스 아일랜드’(Ellis Island)는 1892년부터 1954년까지 이민입국관리소가 설치된 곳으로 유대인 이민의 한 획을 그었던 매우 유서 깊은 장소이다.

이민자들이 입국심사를 위해 대기하던 뉴욕시 앞바다에 있는 섬으로서 미국 사회의 주류로 급부상한 유대인을 비롯하여 영국, 이탈리아, 아일랜드, 독일 등 다양한 민족들의 태반이 엘리스 섬을 통해 아메리카 땅을 밟았다. 아메리칸 드림으로 가는 관문으로서 천신만고 끝에 이 섬에 당도하였지만 신체검사에 불합격하면 되돌아가야 했기에 이민객들이 노심초사하던 고난의 관문이었다.

이중 독일계 유대인은 안정적 정착을 위해 민족과 종교를 노정시키는 배타적 행동을 회피했다. 유대인 단체를 조직하거나 정치적 견해를 표명하는 것을 혐오했다. 이들은 전형적 ‘동화주의’를 선호했다. 이들이 소유한 백화점들은 결코 유대인의 색채를 부각시키지 않으며 지역사회의 문화적 테두리에 녹아들려는 경영 방침에 흔들리지 않았다.

● ‘미국 유명대학’ 교수와 학생 '압도적 비율'
20세기를 지배한 사람을 손꼽으라면 과연 누구일까? 20세기의 정신세계를 뒤흔든 프로이트(Sigmund Freud), 우주관을 일신시킨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 공산주의를 태동시킨 카를 마르크스(Karl Heinrich Marx) 등 세 명이 주인공으로서 이들 모두 유대인이다.

세계의 학문을 선도하고 있는 미국 대학 교수 중 유대인 출신은 30%이다. 아이비리그 교수진은 약 40%를 점유한다.

'아이비리그'(Ivy League)란 미국 동부 소재의 8개 명문 사립대학의 총칭으로 브라운(Brown)·컬럼비아(Columbia)·코넬(Cornell)·다트머스(Dartmouth)·하버드(Harvard)·펜실베이니아(Pennsylvania)·프린스턴(Princeton)·예일(Yale)대학교를 일컫는다.

특히 명문중의 명문인 프린스턴 대학의 총장 및 주요 책임자 90%를, 하버드대, UCLA 의대 및 법대 교수의 50%를 점유한다. 유대인 교수진은 뉴욕시에서만 전체의 25%를, 뉴욕 중ㆍ고등학교 교사 중 50%를 차지한다.

미국 전역에서 유대인 의사의 비율은 14%이며, 뉴욕시 의사의 절반인 50% 정도이다. 미국 법조계 70만 변호사들 중 20%인 14만 명이, 뉴욕과 워싱턴의 유명 로펌의 변호사의 40%가 유대계이다.

그렇다면 유대인 학생들의 대약진은 어떤 수준일까? 명문대 진학률에서도 유대계는 압권이다. 미국 전역의 상위 15개 대학의 21%가 유대인이다.

유대계 대학생 관련 지원단체인 힐렐(Hillel)에 따르면 2003년 기준으로 유대계 학생 비율은 하버드대 29.6%이며, 하버드대학교와 더불어 아이비리그의 양대 명문으로 알려진 예일대학교의 경우에는 26.7%에 이른다.

美 동부 명문인 '아이비리그 대학'들은 1920년대 유대인 학생 비율을 제한하기 위해 쿼터제를 운영한 전력이 있다.

하버드대의 유대계 비중은 1925년 27.6%에 도달한 후 15%로 상한선을 두었다. 1950년대까지 미국의 명문 대학들은 유대인 입학 비율을 쿼터로 제약하였으나 그러한 규제가 철폐되면서 아이비리그를 포함한 명문대에서 유대인 비율은 수직상승하였다.

명문대를 졸업하고 사회 각 분야에 진출한 유대인들은 월가, 대형 로펌, 영화계, 언론계 등의 핵심 자리를 꿰차고 있다. 미국의 파워 엘리트 100명 중 51명이 유대계일 정도다.

● 유대계 출신 ‘노벨상 수상자’ 경이적 점유율
매년 노벨상 수상자 발표를 접할 때면 우리를 놀라게 하는 것이 있다. 유대인의 높은 노벨상 점유율이다. 2012년까지 107회의 노벨상이 집행 되었는데, 유대인은 그중 약 22%-25%를 차지한다.

특히 노벨경제학상에서 크게 두드러지는데, 총 수상자 26명 중 42%가 유대인일 정도로 절대적이다.

마틴 펠드스타인(Martin Feldstein), 폴 크루그먼(Paul Krugman), 조지프 스티글리츠(Joseph Stiglit), 폴 새뮤얼슨(Paul Samuelson), 밀턴 프리드먼(Milton Friedman) 등 노벨경제학상 수상자들이 모두 유대인이다.

비단 이뿐만이 아니다. 의학상의 28%, 물리학상의 26%, 화학상의 20%, 문학상의 12%, 평화상의 9%가 유대인들의 몫으로 돌아갔다.

국제무대에서 유대인이 처음으로 노벨상을 받은 것은 1905년이다. 그해 독일 국적 유대인인 '아돌프 폰 베이어'(Adolf von Baeyer)가 화학상을 받았다.

유대인 혈통의 노벨상 수상자는 1901~2008년까지 모두 178명이다. 국경없는 기자회 등 단체를 제외한 개인 노벨상 수상자가 793명이니 유대인 수상자는 전체의 22.3% 정도로 다섯 명 가운데 한 명꼴이다.

현재 미국의 인구수가 3억 명에 유대인의 비율이 약 2%인 600만 명 내외이며, 유대인의 세계 전체 인구로는 0.2% 밖에 안 되는 극소수민족이라는 것을 감안할 때 기적에 가까운 일이다.

독일계 유대인 전문가들이 미국으로 대거 이주하면서 노벨상의 역전현상이 여실이 드러난다. 1901년부터 1939년 사이 물리학, 화학, 의학 분야에서 노벨상을 받은 미국인의 수는 14명에 불과했다.

하지만 1943년부터 1955년 기간에 이들이 집단 이주하면서 이 분야에서 노벨상을 받은 미국인은 29명으로 늘었다. 독일에서는 역전 현상이 초래되었다. 독일은 같은 기간 35명의 수상자가 5명으로 급감했다.

노벨상을 수상한 유대인 교수들은 탁월한 유대인 학생들에게 멘토가 되고 제자로 삼아 집중 조련시킨다. 여기서부터 비유대인들은 경쟁의 선두를 차지하기 매우 어렵게 된다.

● 美 연방대법관 위시 법조인 출신 ‘선두그룹’
캘리포니아 주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UC버클리 법과대학의 유진 볼로크 교수가 조사한 것을 보면, 미국 전역의 법과대학 교수의 26%가 유대인이다. 미국 유명대학 로스쿨(법학대학원) 학생 중 유대인 비율은 30%에 이른다.

미국에서 로스쿨을 마친 신참 변호사들이 가장 선호하는 곳은 어디일까. 돈을 많이 버는 뉴욕 맨해튼의 유명 로펌일까. 물론 정답이다. 그러나 또 하나의 정답이 있다. 이들이 갈망하는 장소는 워싱턴 DC 소재의 연방대법원이다. 연방대법원의 관문을 통해 첫 발을 딛는 것이 법조계 엘리트 코스의 시작이다.

연방대법원은 하버드, 예일, 스탠포드, 시카고 등 최상의 로스쿨에서 3등 안에 든 학생 중에서만 선발한다. 11-20위권 로스쿨의 경우에는 1등 졸업자에 한해 원서 제출이 가능하다. 실제 연방 대법원 직원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백인들 중 30% 이상이 미국 전체 국민의 2%에 불과한 유대인이라는 점을 주시할 필요가 있다.

현재 종신직인 9명의 美 연방대법관 가운데 3명이 유대인이다. 미국 법조인들의 최종 목표인 연방대법관 전체 9명 중 현재 유대인은 1938년생의 '스테판 브레이어'(Stephen Breyer), 여성 출신으로 1933년생의 '루스 베이더 긴스버그'(Ruth Bader Ginsburg)와 1960년생의 '엘레나 케이건'(Elena Kagan)이다.

'루이스 브랜다이스'(Louis Brandeis)가 1916년 미국 역사상 처음으로 유대인 대법관으로 임명된 이후 1969년까지 유대인이 물러나면 후임으로 유대인을 임명하는 것이 관례처럼 여겨졌다.

그러나 1969년 유대인들과 사이가 좋지 않았던 닉슨 대통령 시절 그런 관례가 깨진다. 뜸하다 첫 유대인 대법관은 1993년 빌 클린턴 대통령이 임명한 '루스 베이더 긴스버그'였다. 유대인들과 밀월을 구가한 클린턴은 이듬해인 1994년 '스테판 브레이어'를 임명해 사상 첫 2명의 유대인 대법관시대를 열었다.

오바마 대통령에 의해 임명된 유대인 대법관인 '엘레나 케이건'이 등장함으로써 유대인 연방 대법관의 막강 트로이카 군단을 구축하게 된다. 케이건은 미국 28대 대통령 '윌슨 대통령' 시절인 1916년 유대인으로는 최초로 임명된 '루이스 브랜다이스' 이후 여덟 번째 유대인 연방대법관이다.

각 대학 로스쿨마다 유대인 법대생 연합회인 JLSA(Jewish Law Students Association)가 구성되어 있다. 전국적으로 막강한 힘을 발휘하고 있는 JLSA는 로스쿨 때부터 미국 법조계의 새싹으로 무럭무럭 성장하고 있는 셈이다.

월스트리트 로펌의 영향력 있는 변호사들은 태반이 유대인들이다. 복잡한 송사에 휘말렸을 경우 필승하려 하면 거액을 주고서라도 유대인 변호사를 선임해야 한다는 것이 미국 사회에 공공연한 비밀이다.

유대인들이 이처럼 법률에 강세인 저력의 원천은 과연 어디일까? 뉴욕의 '마틴 스미스' 유대인 변호사는 “우리들의 종교인 유대교가 법(율법)에 근간을 두고 있기 때문”이라고 간단명료하게 말한다.

실제로 유대종교의 근간은 ‘율법’이다. 야훼는 모세를 통해 필수 준수해야할 10계명을 주었고, 야훼와의 언약인 10계명은 유대인들이 준수하는 모든 율법의 초석이 되었다. 통상 율법은 모세 5경으로 일컬어지는데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이다.

그리고 율법학자들은 이를 613개의 율법으로 세분하여 생활의 모토로 삼는다.

이 가운데 ‘무엇 무엇을 하라’는 긍정적 율법은 248개, '무엇 무엇을 하지 말라’는 부정적 율법이 365개로 유대인의 보편적 생활규범을 상세히 명시한다.

이에 유대인들은 언제든 가장 존경하는 사람으로 율법학자인 '랍비'((rabbi)를 꼽는다. 랍비는 자녀를 둔 유대인 어머니들이 가장 선호하는 직업이다.

이에 법률 중시의 유대인들 사회에서 법률가가 다수 배출되는 것은 너무 당연한 수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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