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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가운데 특히 마음이 난잡할 때 열어보는 상자가 하나 있습니다. 유독 허름해진 그 상자를 열면 구겨졌던 초심이 벌떡 일어나 빳빳해지곤 합니다. 그 안에는 모두 붓글씨로 써진 한 무더기의 편지가 들어 있습니다. 어떤 편지에는 제 마음에서 나온 글이, 어떤 것에는 누구나 한 번쯤은 읽어보았음직한 시 한 편이, 또 어떤 것에는 지나간 세월 동안 혹여 마음 무늬와 향기가 변하지는 않았는지 저어하는 염려가, 그리고 나머지 대부분은 알음알음을 되새기는 그리움이 부드러우면서도 또렷한 필체에 담겨 있습니다.
벌써 이십 년이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선생님께서 대구에 살았던 지인들과 제가 살았던 청송 산골에 처음 오셨던 날이. 여자제자들마다 유명 여배우 이름으로 애칭을 지어 부르셨던 첫인상의 선생님은 마치 쉬지 않고 입을 오물거리며 옹알이하는 아기같이 순후하기 그지없는 분이셨습니다. 소소한 일에도 소녀같이 감동하며 웃으실 때면 패치 아담스의 로빈 윌리암스 얼굴이 떠오르곤 했습니다. 선생님은 누에가 실을 뽑듯 당신이 보는 세상과 사람과 인연과 삶에 대한 끊이지 않는 감흥과 행복감을 조금도 거르지 않고 자아내셨습니다.
적막한 산골의 밤은 깊어가고 한판 신나게 어우러져 노는데 선생님께서 느닷없이 물으셨습니다. 딱 어울리는 이름이 생각났는데 가슴에 하나 더 달아보겠냐고 말입니다. 그저 놀랍고 신기하고 황송했습니다. 그렇잖아도 필명(筆名)이 있었으면 하던 차였습니다. 비록 산골의 농부(農婦)로 살고 있지만 필명이라도 품고 있으면 꿈을 포기하지 않을 것 같아서였습니다. 그때 주신 이름이 바로 흴 소(素)에다 지혜 혜(慧), 즉 하얀 지혜를 뜻하는 소혜(素慧)였습니다, 지금 가슴에 달고 있는. 영혼이 맑고 투명하니 늘 그러한 지혜로 살라시며 이름의 근거도 덧붙여 주셨지요.
그렇게 시작된 만남 이후 열흘이 멀다하고 먹 향에 싸여진 그리움과 바람이 산골로 날아왔습니다. 그리고 서울로 다시 올라온 지 십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생일만 되면 채 마르지 않은 따끈한 먹빛과 먹 향의 그리움을 받고 있습니다. 정성스레 먹을 갈고 한 자 한 자에 마음 담아 쓰셨을 편지를 받을 때마다 마치 선생님을 뵙는 듯 기쁘면서도 한편으론 송구했습니다. 선생님께서 이름과 함께 주문하셨던 말씀 때문입니다. 해서 영혼이 탁해지지는 않았는지 혹여 성근 지혜로 뒤넘스럽게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혹여 가고자 하는 길을 잃고 방황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변함없이 초심을 품고 사는지 되돌아보고 되짚어보며 삶과 꿈을 되새기고 있습니다만 늘 역부족합니다.
생활이 편리해질수록 밀려가는 것들과 함께 밀쳐놓은 것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인하지에 담겨 새록새록 자극하던 그때 그 시절이 수시로 꺼내볼 수 있는 전화기에 저장되고, 음악 한 곡을 듣기 위해 숨마저 죽여 가며 바늘 끝을 맞추던 레코드는 장식품으로 용도변경 된지 오랩니다. 온밤을 마음으로 채워 정성껏 써놓은 편지에 그리운 이의 이름과 주소를 쓰고 우표를 붙이던 그 경건한 설렘이 기계음이 톡톡 튀는 손끝 만남인 메일로 바뀌었습니다. 더 자주 꺼내볼 수 있고, 음색도 선명하고 듣기도 한결 편리해졌으며, 안부 전하는 일이 훨씬 쉬워진 이즈음인데, 왜 마음은 더 강퍅해지고 돌아볼 겨를도 없이 삶은 점점 더 바쁘고 힘들어지기만 하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가을은 자연과 사람의 정취가 맞물린 때입니다. 그래서 가을만 되면 유독 아날로그적 삶이 그리워지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가을은 기다림이 영그는 계절입니다. 가을은 집이 지저분해지면 깨끗이 하듯 삶을 청소하고 환기하는 때입니다. 가을은 잃었던 꿈꿀 권리와 추억을 회복하는 때입니다. 가을은 소중한 것들을 다시 찾아내어 고마움을 깨닫는 때입니다. 가을은 어긋난 시간을 바로 맞추고 허황한 욕망들을 걷어내어 삶을 청담하게 만들기 좋은 때입니다. 어디론가 떠나서가 아니라 자신의 빛과 소리와 내면의 파장 안으로 들어갈 수만 있다면 말입니다.
무엇보다 가을은 사람의 계절입니다. 단 하루를 함께했어도 백년지기 같은 사람이 있습니다. 자주 만나지 못했어도 흘러간 세월이 말랑말랑하고 마음에 틈과 격이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디에 있든 향기를 느낄 수 있고 기억의 강 건너에 있어도 또렷이 살아 있는 첫눈 첫 마음 첫 느낌의 사람이 있습니다. 장맛과 사람 맛은 오래되어야 좋다는 말은 참인 명제는 아닌 듯합니다. 참된 인연은 비록 일기일회(一期一會)일지라도 평생 동행이 되니까요.
혹여 이런 사람이 선뜻 떠오르거든 단 몇 자의 글에라도 가을마음 담아 두드려보면 어떨까 싶습니다. 사람은 나아지기 위해 앞만 보며 살지만 늘 그립고 돌아가고 싶은 자신만의 그때 그 시절이 있습니다. 시계바늘을 되돌릴 수는 없지만 혹시 모르는 일입니다. 아날로그적 가을이 더 풍성하고 견고해진 삶을 낳는 도깨비방망이가 될는지. 저도 올 가을엔 선생님께 더 자주 편지를 드려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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