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상황이든 성실로 세파를 헤쳐 나갈 때면
필경 하늘의 축복과 성공의 결실이 동고동락
새 해 들머리다. 굳이 신앙이 없어도 가슴에 소원 하나쯤 품게 되는 때다. 종교를 막론하고 기도의 깊이는 얼마나 진심을 담느냐에 달려 있다고 한다. 종교에서 수행과 순례를 강조하는 까닭이다. 이맘때는 많은 사람들이 산에 올라간다. 솟아오르는 해를 보거나 하얗게 피어난 눈꽃을 보기 위해서다. 그처럼 뜨겁게 혹은 깨끗하게 새해 첫 시작을 기억하고 싶기 때문일 것이다.
올해는 갑오년(甲午年), 말의 해다. 벌써부터 ‘청말띠’라고 시끌시끌하다. ‘여성이 말띠면 팔자가 세다’는 속담이 있는데, 그 중에서도 푸른 말은 유독 드세다는 입소문이 세간에 자자하다. 12간지의 일곱 번째 동물인 말이 띠가 되면 여성은 정말 그리도 박복할까? 한 마디로 이는 ‘말’도 안 되는 얘기다. 우리 전통적 가치관과도 전혀 맞지 않다. 이 속설은 추측컨대 일본에서 들어온 습속이다. 실제로 한국과 중국 문헌이나 사료에서는 이런 구절을 찾을 수가 없다. 오히려 조선왕조를 보면 말띠 왕비가 수두룩하다.
정현왕후(貞顯王后, 1462∼1530)와 인열왕후(仁烈王后, 1594∼1635), 인선왕후(仁宣王后, 1618∼1674), 명성왕후(明聖王后, 1642∼1683·조선 현종의 비)는 모두 말띠였다. 대한제국 순정효황후(純貞孝皇后, 1894∼1966)도 마찬가지다.
당시 그런 속설을 믿었다면 사주팔자를 엄격히 따졌던 왕실에서 그렇게 팔자가 센 여인을 왕비로 간택했을 리 만무하다. 게다가 세시풍속에서도 말은 치성의 대상이었다. 음력 정월 첫 ‘말날’ 상오일(上午日)은 말에게 제사를 지내고 숭상하는 날이었다. 이날 장을 담그면 맛이 좋다는 풍속도 있으니 맛있다의 ‘맛’과 말의 발음이 비슷한 것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시월상달(10월) 말날에는 붉은 팥떡을 해 마구간에 차려 놓고 고사를 지내기도 했었다. 그렇게 말을 존중하는 마음으로 대하는 한국인의 사랑은 현대에 와서도 이어진다. 그동안 출시되었던 승용차 브랜드를 보면 ‘포니(조랑말)’ ‘갤로퍼(질주하는 말)’ ‘에쿠우스(말을 뜻하는 라틴어)’처럼 말을 상징하는 게 꽤 된다.
그리고 기성세대 중에는 말표 고무신이나 운동화도 추억하는 이가 많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활력과 건강의 상징인 말띠는 자랑스러워 할 일이지 결코 나쁠 게 없다는 것이다.
새 해가 시작되면서 많은 계획과 각오로 마치 지난해와는 완전히 다른 색깔의 삶을 살아갈 것처럼 호들갑을 떨기도 하고, 이제껏 경험하지 못했던 거창한 일상을 전개해나갈 듯이 두 주먹을 불끈 쥐어보기도 하지만 확실한 건 어제와 오늘과 내일은 결국 한 길이라는 것이다.
단지 어제보다는 좀 더 나은 오늘을, 오늘보다는 조금이라도 발전된 내일을 살고픈 것이 인지상정인지라 가능하다면 미처 깨닫지 못했던 내 속의 불찰과 부족함을 되짚어보면서 겸손하게 다른 사람들과 어울려 새 해를 시작하면 되는 거다.
그런 의미에서 필자는 새 해의 첫 화두로 ‘다름을 인정할 것’을 제언한다.
극작가 ‘버나드 쇼’는 이런 말을 했다. “자유는 책임을 의미한다. 그러나 대부분 사람들은 자유를 두려워한다.” 모든 사람이 자유를 원하지만 조건이 수반된 자유, 즉 책임을 질 수 있는 조건이 갖추어져 있을 때 자유를 선택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남에게 의존하는 순간 진작에 구속감은 생성된 것이다. 현실적으로 남과 조금 다른 구속과 제재가 마치 절대적인 자유를 박탈당한 상황인 것처럼 오해를 한다면 정작 진정한 자유의 가치는 맞닥뜨려도 깨닫기 힘들 것이다.
필자는 새 해의 두 번째 화두로 ‘사랑을 전파할 것’을 제언한다.
사람은 이른바 사랑을 실어 나르는 수레이다. 그래서 사람에게는 그 사랑을 건네줄 또 다른 누군가가 필요하다. 그 누군가가 원할 때 이리저리 바쁘게 불려 다니는 수레가 될 수 있다. 미소로 위안을 주고, 좋은 대화 상대가 되어주고, 바쁠 때 작은 힘이 될 수 있고, 마음의 수레에 사랑을 가득 실어서 필요한 곳에 나눠준다면, 그 수레는 기쁨의 열기가 넘쳐흘러서 향기가 아른대는 꽃수레가 될 것이다.
세상에는 열두 가지의 강력한 것이 존재한다. 먼저 짚어 볼 강력한 존재가 돌이다. 그러나 그 돌은 쇠에 깎이고 만다. 또 쇠는 불에 못 견딘다. 불은 물로 꺼버릴 수 있고, 아무리 막강한 물이라도 구름에 흡수되며, 물을 흡수한 구름은 바람이 불면 흩어지거나 날아가 버린다.
그러나 이 바람도 인간만은 흩어지게도 없어지게도 못한다. 물론 간혹 예상 밖의 거대한 열대성저기압이나 회오리바람에 의한 재해를 입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바람이 인간의 삶을 결정적으로 좌우한다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은 공포나 괴로움에는 결국 견디지 못하고 비참하게 저버린다. 공포감을 없애기 위해 술을 마시지만 술은 잠을 자면 바로 깨게 되고, 그 막강한 잠도 죽음을 꺾을 수는 없다. 그러나 죽음도 사랑을 이길 수는 없으니 이 세상에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사랑의 힘만큼 강력한 것은 없다.
아무리 힘겹고 버거운 일도 이겨내게 하는 것이 사랑이다. 어느 순간 사랑의 모습이 억압이나 참견으로 느껴질 때도 있고, 혹은 속박이나 억누름으로 보여질 수도 있겠지만 생각하고 느끼는 어떤 가치와 좀 다르다고 하여 사랑의 본질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필자의 세 번째 새 해 화두인 ‘성실로 이겨낼 것’에 관한 이야기를 더 이어간다.
성실은 어려운 과정이나 수순이 필요하지 않다. 변함없는 근면과 꾸준함으로 자기 자신과의 대화에서 인정받는 자신감만 잃지 않으면 성실의 이름표는 내 가슴에 자랑스러운 훈장처럼 자리할 것이다.
‘다름을 인정할 것’ ‘사랑을 전파할 것’ ‘성실로 이겨낼 것’이라는 화두를 어떤 상황에서라도 항상 기억하면서 지금 당장은 아닐지라도 가까운 언젠가, 필경 하늘의 축복과 성공의 결실이 함께 할 것이라 여기면서 새 해의 첫 장을 열어본다.
자신이 머물고 있는 자리의 아름다움을, 소유하고 있는 만물의 가치를 깨달을 수 있을 때 비로소 행복은 우리의 것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새롭게 시작되는 올 한 해는 과연 어떤 마음가짐으로 삶을 누려야 의미 있고 보람찬 삶이 될 수 있을 것인지 자못 설레는 이즈막이다.
요즘처럼 날씨가 추워서 기온이 영하로 곤두박질 칠 때면 산행 길에 눈부신 상고대(서리꽃)도 자주 만나게 된다. 상고대는 대기 중 수증기나, 섭씨 0도 이하로 냉각된 미세한 물방울이 나뭇가지나 잎, 지표면 등에 얼어붙은 것을 가리키는 우리말이다.
나뭇가지 위에 피어난 화려한 상고대는 바람이 셀수록 크게 자라지만, 아쉽게도 해가 뜨면 금세 녹아 없어진다. 잠깐 동안 우리에게 웅장하면서도 황홀한 대자연의 아름다움을 선사해주고는 이내 스러지고 마는 것이다. 마치 인생의 한 단면을 보는 것 같아 숙연해지기도 하는, 한 겨울의 대표적인 풍광이다.
단 하루라도, 단 한 시간이라도, 지난해를 깊은 마음의 눈으로 돌아보며, 간직할 것은 담고, 좋지 않았던 일들의 기억은 거침없이 흘러가는 세월에 흘려보내야만, 비로소 새 해에 걸맞는 새로움으로 자신 있게 나아갈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제 새 해 빈 노트에 과연 무엇을 써야 할지 생각을 해본다. 바야흐로 시작된 미래는 활짝 열려있다. 작은 계획이라도 열심히 잘 실천하여 더울 때는 시원하게, 추울 때는 따뜻하게 보내는 사소한 축복의 일상으로 한 걸음 한 걸음 올 한 해를 살아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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