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지난해 끝에서부터 해가 바뀌기 전까지 나는 완전히 녹다운(knockdown) 되어 살았다. 굳이 의식하고 싶지 않아 모르는 체하고 아닌 척했던 실제상황이 마음은 물론 꿈마저 뒤흔들며 회생지망(回生之望)을 제어했기 때문이었다. 끊임없이 더블펀치를 맞으며 한해 끄트머리에 이르자 희망은 내게 테크니컬 녹아웃(technical knockout)을 선언했다.
집을 비워 달라는 갑작스러운 통보는 그야말로 청천벽력이었다. 몇날 며칠 찾아보았으나 보증금과 월세에 맞는 집은 어디에도 없었다. 일단 저질러 놓고 보자 싶어 각각 두 배가 되는 집에 계약을 하고는 이사했다. 현 상태를 유지한다면 한 발짝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영영 그 상태에서 허덕일 것만 같아서였다.
가끔 있는 글 쓰는 일은 수입이 규칙적이지 않았다. 이런저런 일을 병행하면서 꾸역꾸역 버텨 오긴 했으나 어림없었다. 무슨 일이든 해야만 했다. 하던 일을 본으로 여기저기 무턱대고 찾아가고 이력서도 수없이 보냈다. 하지만 현실의 그림자는 생각보다 컸고 짙었다. 특별한 재주나 인연 줄이 없는 내 나이 여자가 할 수 있는 일은 이미 정해져 있다는 사실을 깨닫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불문곡직하고 정중하게 거절할 때 알아챘어야 했는데…….
포기와 절망은 나와는 상관없는 일. 무엇보다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움직여야 했다. 까짓, 농사만큼 힘들까 싶었다. 글과 관련된 일은 물론 빨래며 청소 등 닥치는 대로 일했다. 하지만 살기 위해서 나는 시들어갔다. 꿈이 희미해졌고 날로 마음이 황폐해졌다. 나는 알고 있었다, 문여기인(文如其人) 언여기인(言如其人)의 의미를. 평화롭지 못하고 거칠어진 마음에서 나오는 언문(言文)으로는 누구도 행복하게 해줄 수 없다는 사실을.
만물이 푸르게 눈뜨는 계절에 나는 온몸으로 한기(寒氣)를 느꼈다. 아무리 힘들어도 나의 뜨거운 피는 쉬지 않고 흘렀는데……. 태엽이 다 풀린 장난감처럼 내 삶과 꿈은 '동작 끝'에서 멈춰있었다. 가장 두려워하는 일이 내게 일어나고 있었다. 지쳤던 거다.
어디론가 달아나 꼭꼭 숨어버리면 고통이 사라지지 않을까. 조울증인가도 싶었다. 사소한 희비에도 예민해져 오르내리는 꼴이 꼭 그 짝이구나 싶었다. 망상과 어울리고 허상과 놀아나며 진상(眞相)을 멸시했다. 살아야 하니 숨을 쉬었고 숨을 쉬니 움직여졌고 움직이니 시간이 갔다. 문득문득 비바람 속에서 천둥이 치고 번개가 일어나는 것처럼 꿈이 돌아오곤 했지만 그럴 때마다 칙칙하고 우울한 연민의 꽃만 피었다 스러졌다.
안간힘을 쓸수록 가시 돋친 연민의 굴레가 더 깊이 상처를 내며 파고들었다. 나날이 의기소침해졌고 어느 순간 자신감마저 텅 비어 있었다. 사람이 싫고 사람과의 관계가 덧없고 사람들 틈의 내가 구차스럽게만 보였다. 메피스토펠레스가 나타났다면 선뜻 손을 잡고 매달렸을지도 모른다, 허접스런 목숨이지만 맞바꿀 것이 없냐며.
하지만 어제는 끝났고 또한 지나갔다.
어제의 삶은 끝났고 어제의 좌절도 방황도 끝났다. 또한 지나갔다. 어제의 마음도 지나갔고 어제의 인연도 어제의 지식도 고통도 모두모두 지나갔다.
강물은 어떤 걸림돌에도 주저하지 않는다. 피하지도 거스르지도 거부하지도 않는다. 그저 거리낌 없이 묵묵히 흐를 뿐이다. 과거의 생은 지나갔고 미래의 생은 아직 오지 않았다. 그리고 현재는 잠시도 머물지 않고 끊임없이 흘러간다.
지나간 일에 연연하지 않고 아직 오지도 않은 일로 애태우지 않으며 현재의 삶을 성심껏 지켜 나간다면, 그리고 이 모든 일들도 언젠가는 끝나고 또한 지나간다는 사실을 깨닫는다면,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진흙 속에서도 더럽혀지지 않는 연꽃처럼, 홀로 가는 무소의 뿔처럼 자유로울 수 있으리라.
고난을 만날 때마다 나는 스스로에게 상처를 만들곤 했다. 다시 고난에 직면했을 때 그 흉터를 보면서 주문(呪文)을 외면 거짓말처럼 강해졌다. 말하자면 고난극복을 위한 일종의 자가 치료법인 셈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상처를 만들지 않기로 했다. 대신 소중하다고 집착했던 것 하나를 내려놓기로 했다. 실바람에도 날려갈 만큼 작고 가벼워질 때까지, 연꽃 만나고 돌아가는 바람 같은 얼굴이 될 때까지. 그리고 믿는다, 마음 한 번 바로 놓음으로써 억겁의 과업도 녹일 수 있다고. 그리고 이 또한 언젠가는 끝나고 또한 지나간다는 사실을.
사람들이 꿈을 이루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자신을 믿지 못해서다. 즉 인내를 요하는 기다림을 이기지 못하고 지레 지쳐 포기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지쳤어’라고 쉽게 말한다. 지친다는 것은 자신감 상실과 존재감 포기를 전제로 하는데도 말이다. 결국 성패는 외부의 문제가 아니라 자신의 내면문제에 달려있다. 자신의 실체와 현주소를 알아차리며 지치지 않고 목적지를 향해 무던히 나아간다면 세상에 이루지 못할 일이란 결코 없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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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인숙 작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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