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담자: 정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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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영자 회장 |
[일요주간 = 이은화 작가] 2012년 《수필과 비평》에서 신인상을 받으며 작품 활동을 시작. 작품집으로는 2016년 첫 수필집 『안단테 칸타빌레』를 발간하였고 『풍경을 짓다』와 『틈새에서 문득』이 있다. 작가의 산책길해설사회회장을 역임하였고 제주도박물관미술관진흥위원회위원으로 활동하였다. 현재 [사]한국문입협회 서귀포지부 지부장을 맡고 있다. 제주헤럴드 ‘정영자의 느낌 그리고 쉼표’, 서귀포신문 ‘문필봉’, 제주일보 ‘금요에세이’ 필진으로 활동하고 있다. 12회 서귀포문학상을 수상했다.
Q. 안녕하세요, 정영자 선생님. 저희 ‘작가 초대석’에 함께 해 주셔서 기쁩니다. 2012년 『수필과 비평』 등단 이후 세 권의 책을 펴내셨습니다. 그중 지난해 9월 출간한 에세이집 『틈새에서 문득』은 일상의 작은 순간들을 담았는데요. 선생님이 포착하시는 ‘틈새’는 어떤 순간인가요?
▶ 사람에게는 누구나 말로 설명되지 않는 부분이 있습니다. 잘 지내고 있다가도 문득 허전해지기도 하고 어떤 장면이나 글귀에 붙잡혀 오래 머물기도 합니다. 그림을 보다가 음악을 듣다가 문득 서글퍼지기도 하고 아름다움에 도취되기도 합니다. 길을 가다가 문득 눈길을 사로잡는 누군가의 뒷모습이 슬프게 다가올 때도 있습니다. 저에게 ‘틈새’는 의도하지 않았던 어떤 순간입니다. 그 순간의 감정이 저의 등을 밉니다. 글을 쓰게 하고, 음악을 반복해 듣게 하고, 혼자 걷게 만들고, 미술관을, 바닷가를 찾아가게 이끕니다. 이 책에 쓰인 글들은 그렇게 순간의 번뜩임과 평범한 사유의 샘에서 길어 올린, 어떻게 보면 일상의 자잘한 이야기들의 모음입니다.
Q. 이 책을 독자들에게 한 문장으로 소개한다면 어떻게 표현하시겠어요?
▶ 제 책을 리뷰한 기사에 “그림 풍경을 말하며 인간 존재에 대한 사유를 길어내고, 음악을 감상하면서 삶에 대한 깊은 성찰을 담아낸 에세이”라고 했더군요. 이 문장으로 대신하고 싶습니다. 저의 글의 주제는 글마다 틀리지만, 저는 때때로 좀 거창하게 들리지만 ‘존재와 삶’이라는 물음을 품고 이의 해답을 얻으려고 노력합니다. 일하고 있을 때나, 놀고 있을 때나, 책을 보거나, 글을 쓰거나 저 두 개의 단어는 언제나 나의 문장으로 지어지기를 바랍니다. 거기서 저의 존재와 삶의 의미는 태어나고 성장하니까요.
Q. 작품에서 미술, 음악, 문학 등 예술을 통한 사유의 확장은 불교적 세계관을 연상케 하는데요. 선생님 삶에 가장 깊은 울림을 준 작품이나 음악이 있다면요?
▶ 모든 예술 작품이 제게는 영감을 주는 원천이라 볼 수 있습니다. 굳이 꼽는다면 천경자의 작품입니다. 특히 그녀의 작품 중 ‘생태’는 27세의 나이에 온몸에 소름 돋는 35마리의 뱀을 그리며 절망을 극복한 여인을 기억하게 합니다. 어려운 시대를 건너면서 여성으로서의 자존심을 잃지 않고 저 만의 길을 간 사람, 이 시대를 사는 여성들에게 깊은 울림을 주지 않나 생각합니다.
“오래지 않아 / 내 귀가 흙이 된다 하더라도 / 이 순간 내가 / 제9 교향곡을 듣는다는 것은 / 그 얼마나 찬란한 사실인가” 피천득 선생의 시 한 구절인데 제가 음악을 듣는 그 기쁨을 대신 말해주는 듯해서 여기에 인용해 봅니다. 저도 자주 베토벤을 듣습니다. 그의 음악을 들을 때마다 내가 다시 태어난다는 생각이 든다면 과장일까요. 이 나이가 되어서도 베토벤을 만나고 그의 음악을 듣는 삶, 어떻습니까? 괜찮지요.
Q. 책에서 남편분과의 이별을 언급하셨는데요. 그 이후의 삶과 글쓰기는 어떻게 변화했나요?
▶ 구태여 제 평생에서 가장 큰 사건을 꼽으라고 한다면 나는 남편과의 사별의 순간을 들겠습니다. 『틈새에서 문득』에도 썼듯이 한창 투병 중이던 남편은 그저 태연하게 저와 대화하다가 한순간에 눈을 감았습니다. 밤이었지요. 나는 처음에는 두렵고 놀라서 어쩔 줄 몰랐고, 다소 정리가 되자 나는 운명적이었던 그 밤을 붙들어 세워놓고 생각해 봤습니다. “내가 겪어야 하는 이별이라면 내가 받아들이자. 저 이도 그런 것을 원할지도 모른다. 평소에 이런 이야기를 해왔으니….” 이런 성찰이 일더군요. 그래서 내 생각을 갑작스러운 사별이라는 ‘허무’에서 책을 읽고 글쓰기로 전환할 수 있었습니다. 내 안에 서정의 우물이 말라가면, 연민의 지층이 흔들거리면, 나는 읽기와 쓰기를 통해 채우거나 그들을 붙잡습니다. 나를 떠나가지 않도록, 서정과 연민이 나에게 충만해 글쓰기에 채워지도록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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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당미술관> 변시지 작품 해설을 하고 있는 장면 |
Q. 미술관 해설사로도 활동하고 계십니다. 이 활동에 대해 들려주세요.
▶ 서귀포에는 20세기 근현대 서양화의 거목이자 불운한 천재 화가 ‘대향 이중섭’의 삶과 예술세계를 엿볼 수 있는 이중섭미술관, 이중섭 거주지에서부터 서예를 통해 ‘도(道)’를 성찰한 한국 서단의 거장 ‘소암 현중화’ 선생의 소암기념관, 수많은 선과 색을 버리고 황톳빛으로 제주를 노래한 폭풍의 화가 ‘우성 변시지’ 화백의 황톳빛 작품을 만날 수 있는 기당미술관이 있습니다.
제가 소속되어 있는 ‘작가의 산책길’은 서귀포에서 태어났거나, 이곳에 머물며 예술적 영감을 받았던 이 세 예술가의 삶과 작품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산책길입니다. 이 길을 따라 걷다 보면 중간중간 제주 지역 작가들을 비롯해 국내외 작가들의 작품이 설치되어 있어 서귀포를 예술적으로 표현한 다양한 작품들도 함께 감상할 수 있습니다.
미술관에서 제가 하는 해설은 “작가란 어떤 사람인가”에 대한 내용으로 시간을 할애하기도 하지만, 작품의 ‘정신’, 작가가 작품에서 보여주고자 하는 의미를 나름대로 해석해 설명해 드립니다. 물론 전문가들의 작품 평 흐름을 벗어나지 않는 선에서 저만의 감상평을 보태는 일이겠지요. 감상하는 이가 작가의 삶과 추구하는 예술 경향, 작품의 배경 등을 중심으로 작품에 접근하기 쉽도록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Q. 서귀포 문인협회 회장으로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사업은 무엇인가요?
▶ 서귀포문인협회는 창립된 지 어언 37년을 맞고 있습니다. 고 한기팔 시인과 고 오승철 시인 등의 작고 시인과 지금도 시작 활동을 하고 계신 김용길, 강문신 시인들이 서귀포의 문학의 터전을 세운다는 의미로 처음 발족이 되어 지금까지 명맥을 유지해 오고 있습니다. 조그만 지역의 문인협회지만 다양한 행사로 그 격을 다지고 있습니다. ‘시로 봄을 맞는 서귀포’, ‘서귀포문학제와 세미나’, ‘서귀포칠십리문학작품 공모’, ‘문학탐방’, ‘마을탐방’ 등의 행사를 연례로 개최하고 있고, 일 년에 두 번 발간되는 『서귀포문학』은 회원들의 작품을 위주로 문학인의 저변확대를 위해 애를 쓰고 있습니다.
서귀포는 현대문학의 뿌리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를테면, 1937년 미당 서정주가 서귀포 위미리 앞바다에 있는 ‘지귀도’에서 6개월간 머물면서 ‘고을나의 딸’ 등 아홉 편의 작품을 썼는데, 이는 그의 첫 시집 ‘화사집’에 지귀도 시편으로 실려 있습니다. 이듬해 정지용 시인이 한라산에 올라 그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백록담’을 남겼고, 같은 해 노산 이은상 시인도 서귀포의 곳곳을 다니며 주옥같은 시편들을 많이 남겼습니다. ‘서귀포와 문학’이라는 기조를 바탕으로 우리 문협에서는 제주 지역과 시민, 그리고 다른 지역 문인들과의 교류도 중요하게 생각하여 문화사업을 유치하며 활발히 활동하고 있습니다.
회장으로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업은 문학이 시민과 어떻게 소통해야 하는지와 일 년에 두 번 내는 문예지 발간입니다. 지역 작가들은 본인의 작품을 발표할 지면이 한정적입니다. 중앙에서 원고 청탁을 받는 일도 소수에 불과하지요. 종합 문예지의 틀로 매번 구성되는 『서귀포문학』은 지역 문인들의 창작 문학작품을 발표하는 공간이며 ‘광장’으로서의 손색없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이 문학지를 통해 서귀포문협은 산남을 대표하는 문학단체로서 지역의 문학회와 시민과의 소통의 길을 열어놓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지역의 문화와 역사와 예술, 그리고 지역민의 삶을 들여다보며 문학을 좀 더 깊고 풍성하게 이끌어 가겠다는 우리의 신념이 굳게 깔려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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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틈새에서 문득』을 읽은 뒤 감상평을 나누는 모습 |
Q. 전국 문인들을 서귀포로 초청하는 문학기행을 진행하신다고요. 문학과 지역의 만남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실 수 있을까요.
▶ 이 사업은 ‘예향의 도시는 잠들지 않는다’라는 사업명(부제: 서귀포의 역사와 문화를 전국 문학지에 싣고)으로 제주국제자유도시개발센터(JDC) 도민 공모 사업자로 선정되었기에 가능한 행사였습니다.
약 180만 년 전부터 1천 년 전까지 화산활동으로 형성된 제주도는 지형적으로 학술 가치도 높지만, 문학의 원천이기도 합니다. 독특하고 신비한 자연풍광, 1만 8천의 신과 신화 이야기, 유배 문화와 일제강점기의 아픈 역사와 아직도 끝나지 않은 4·3의 비극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관광으로 국내외 수많은 사람이 찾아오는 섬이지만, 서귀포문협에서는 더 깊이 보고 느끼며 체험하는 인문학적 탐방 체험을 택한 것입니다.
진행은 전국 문학단체 소속 문인 중 선착순으로 받고, 2박 3일간 제주의 유배문화, 해녀문화, 자연과 역사, 그리고 제주의 탄생과 생태계의 보고 등을 탐방하는 프로그램으로 구성되었습니다. 이 사업에 참여한 문인들은 여기에 참가했던 경험을 작품으로 남겨서 자신이 속한 문학단체가 발행하는 문학지에 게재하도록 하고 또한 ‘작품집’으로 발간하였습니다.
전국 문인들의 이번 제주 탐방 기획의 의도는 단순한 여행을 넘어 서귀포 지역 내 역사, 예술, 생태 등 인문학적 가치가 있는 특별한 장소에서 문학적 영감을 찾고, 서로 다른 지역 문인과 깊은 교류의 장을 마련하고 창작 세계를 넓혀나간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이 탐방에 참여한 문인들이 남긴 “그냥 들어서 알고 있던 내용을 현장에서 직접 체험하고 느끼게 되어서 경이로운 경험을 하였다”라는 후기는 높은 만족도를 나타내는 것이라고 평가합니다. 무엇보다도 전국 문인들이 이 행사에 참여하고 문학적 영감을 얻어간다면 저희로서는 더없는 기쁨입니다.
Q. 제주의 예술가나 문인 중 특별히 마음에 두고 계신 분이 있으신가요?
▶ 폭풍의 화가 ‘변시지’입니다. 황토색 바탕에 쓰러져가는 초가와 초가를 에워싼 허물어진 돌담, 바람 부는 데로 휘어진 해송, 지팡이를 짚고 서 있는 허리 꾸부정한 남정네, 조랑말과 까마귀, 해안엔 거친 파도가 밀려오고, 저 먼 수평선 근처에는 작은 배 한 척 떠 있는 고적한 풍경. 어딘지 장소성이 분명치 않아도 누가 보아도 제주가 연상되는 그림입니다.
생전 화가는 후학과 친지들에게 “나만의 것을 그려야 한다. 그림을 그린다는 건 외로운 것이다. 근래에는 초가집도 빼고, 까마귀도 빼고, 사람도 빼고, 그저 바다와 하늘만 그릴 때가 있다. 등장하는 소재들이 점점 사라지고, 언젠가는 점 하나로 제주를 표현하고 싶다.”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화가의 이 표현은 작품을 하는 작가의 깊은 고뇌와 궁극의 아름다움을 지향하는 철학이 압축된 알레고리로 해석합니다.
Q. 세계의 예술가 중에서 지속적으로 영감받는 인물이나 작품이 있다면 소개해 주세요.
▶ ‘한 번 뿐인 생을 어떻게 사느냐’는 고민이 모든 예술의 출발점이라고 생각합니다. 한 번 뿐인 나의 삶을, 타인의 삶을 연민의 정으로 바라보며 위로할 수 있는 마음이 문학의 기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사는 동안 삶의 빛남은 우리의 삶을 떠나서 동떨어진 곳에 있는 것이 아니고 바로 지금 내가 있는 여기에서 출발하는 것이지요.
저는 그리스신화 시지프스의 이야기에 제 삶을 가끔 비춰 봅니다. 신들은 잘못을 저지른 시지프스에게 형벌을 내립니다. 높은 산에서 굴러내리는 바윗덩어리를 올리고 다시 굴러 내려오면 다시 올리는 형벌. 그것은 끝이 없기에 끔찍하지요. 숨은 턱에 차고, 팔다리에 불끈 솟는 힘줄은 터질 듯하고, 땀은 비 오듯 흐릅니다. 모두 다 그만두고 주저앉아 버리고 싶을 겁니다. 그러나 그 끔찍한 형벌에도 바위가 굴러 내려오기까지 평지를 걷는 휴식의 순간은 있습니다. 바위를 올려야 하는 노동과 평지를 걷는 휴식. 이 반복되는 행위가 우리의 삶이 아닌가, 사색하고 묵상합니다.
편안하게 살다가도 어느 순간 괴롭고 힘든 일을 겪어야 하고 우리는 그것을 이겨내고 다시 살아갑니다. 이제 칠순 중반으로 접어든 저도 순탄치 않은 삶을 살아왔습니다. 그리고 주저앉고 싶은 고비 고비에서 시지프스처럼 ‘지루하고 끔찍함’을 견디며 살아왔습니다. 그때, 제가 선택한 피난처가 독서와 글쓰기였습니다. 이 선택으로 저는 내 인생의 날실과 씨실을 추슬러 나름의 옷감을 짜볼 수 있었고 제 주변의 사람들과 타인의 고통과 행복을 눈여겨보게 되었지요.
Q. 새해에는 어떤 글을 쓰고 싶으신가요? 준비 중인 작품이 있다면 살짝 들려주세요.
▶ 큰 틀에서는 서귀포를 주제로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쓰고 싶습니다. 사진을 찍기를 좋아해서 포토에세이를 한 권 내겠다는 계획을 몇 년째 하고 있는데, 출간할 수 있도록 정진하는 한 해가 될 듯합니다.
Q. 끝으로 수필가로서 그리고 지역 문학계 리더로서 독자들과 후배 문인들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다면 무엇일까요?
▶ 글은 구체적이고 진실해야 하며 자기만의 사유와 철학, 문장이 있어야 한다고 선학(先學)으로부터 배웠습니다. 제 경험으로는, 글쓰기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쓰고 버리고 다시 쓰며 원고지를 산처럼 쌓아 버릴 때 자신만의 세계관과 문장이 완성됩니다. 절망과 희망 사이를 오가는 그 수고와 아픔을 견딘 이만이 해낼 수 있는 일이지요.
후배 문인들에게 따로 할 말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모든 작가가 한결같이 하는 말을 저 역시 전하고 싶습니다. “좋고 나쁨을 따지지 말고, 아무 글이라도 부지런히 쓰십시오.”
* 오늘 귀한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서귀포의 푸른 자연 속에서 더욱 깊이 있는 작품들을 만나 뵐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또한 서귀포 문인협회를 이끄시며 지역 문학을 가꾸어 가시는 일에도 좋은 결실이 함께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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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은화 시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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