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ZOOM IN] 우리 사회를 보며 죄와 벌을 다시 읽는다

최철원 논설위원 / 기사승인 : 2025-04-02 10:5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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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철원 논설위원
[일요주간 = 최철원 논설위원] 봄이 봄 같지 않고 뒤숭숭하다. 꽃을 보아도 얼굴에 미소가 피어오르지 않는다. 벚꽃이 천지를 환히 비추지만 밝음이 없다. 개나리가 지천을 노랗게 물들였고 목련도 뻥끗 웃는데 마음은 무겁다. 전국에 산불이 일고 도심에는 연일 탄핵 찬ㆍ반 집회로 거리에 분노가 너무 많다. 가게에는 손님이 끊기고, 민심은 둘로 쪼개져 정국은 난파선이 되어가고 있다. 안 그래도 한반도는 반쪽인데 그게 또 반으로 갈라져 반목하고 분열하니, 이 아포리아 끝의 결과는 어떻게 될 것인가?

분노와 분열의 정치는 동전의 양면처럼 서로 부추기니 사람들은 저마다의 주장과 저마다의 진실로 우리 사회가 혼란스럽다. 4류 정치가 만개(滿開)한 지금, 자신은 죄가 없고 상대는 죄가 있다며 우김질하는 세상이다. 정치인이 죄지은 자로 좌표가 찍히면 어떤 벌을 받고 결과가 초래되길래 저토록 죽기 살기로 싸우는가. 죄와 벌의 상관관계에 생각이 깊어 예전에 읽었던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을 다시 읽었다.

오랜, 아주 오랜 세월이 지났지만 여전히 우리에게 말을 거는 이야기가 있다. 스토리 속에 인간의 본성과 삶의 지혜를 압축해 놓은 이 소설은 동서양을 가리지 않고 죄지은 자와 벌에 대한 명고전으로 읽혀졌다. 널리 알려진 소설 '죄와 벌'의 내용을 소개하자면, 가난 때문에 학업을 중단한 법학도 라스콜니코프가 전당포 노파를 살해하는 것으로 소설이 전개된다. 그는 사회에 아무 이득도 못 되면서 가난한 사람 피만 빠는 이(蟲)같은 존재를 없애 그 돈으로 다수를 구한다는 정의로운 목적에서다. 라스콜니코프는 전당포 노파를 죽이고도 정작 돈은 취하지 않는다. 돈은 목표가 아니었고, 대신 그에게는 언젠가부터 품어온 사상이 있었다. 인간은 '평범한 사람'과 '비범한 사람'으로 두 부류로 나뉘는데, 비범한 사람은 죄를 범할 권리가 있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정치인과 국회의원이나 법을 주무르는 사법부 군상들. 그들은 죄를 짓고도 자신의 행위는 죄가 아니라며 우김질이 심하다. 심지어 일부 정치인은 자신이 비범해 죄를 범할 권리를 가진 듯 죄를 짓고도 눈 하나 깜짝 안 한다.

히브리어 '죄' 는 하나님의 뜻을 절대 기준 삼은 개념이고, 죄(罪)라는 한자는 '그릇된 일을 하여 법망에 걸리다' 의 의미를 지녔다 한다. 러시아어(語) 죄(prestuplenie)에는 '넘어서다'라는 뜻이 담겨 있으며, 히브리어나 한자에 비해 관념적이고 표상적이다. 보편적 기준에서 죄는 근본적으로 상식의 선(線)을 넘는 행위다. 그 선을 사회제도로 획정하면 사법이 되고, 인간의 도리로 규정하면 윤리가 된다. 마음속에 그어놓은 준엄한 선이 양심이다. 모든 죄 중에서도 가장 용서받지 못할 죄가 양심을 벗어나는 일이라고 평범한 사람들은 생각한다. 넘지 말아야 할 선에 대한 보편적 인식이 있기에, 일상생활에서도 어느 지점에서는 멈추고 삼가할 줄 아는 것이 상식이다.

"죄를 지었으면 처벌을 받는 게 원칙이다"라고 민주당 박찬대 원내총무가 윤석열 대통령 탄핵을 주장하며 말했다. 대통령이 법을 지켜야 함에도 지키지 않고 지키지 못한 이유를 설명해야 하는 현실을 '계엄 선포'라는 비상식적 행위로 야당에 맞섰다. 대통령을 하겠다는 사람이 누구보다 법을 중시하고 지켜야 하며 모범이어야 함에도 법을 무시하는 태도, 과연 이것이 올바른 사회를 위해 맞는 것인가.


결론을 미리 정해 놓은 상태에서 형식적 절차만 진행하는 사법부의 판결을 내 입맛에 따라 '정치 판결' 과 '내로남불' 주장의 이율 배판이 어이없다. 대통령이나 야당 대표나 사법부 모든 군상들은 법을, 법으로보다 자신들의 도구로 삼는 행동이 도를 넘고 있다. 이보다 더 큰 죄는 없다.

대한민국은 대통령과 야당 대표가 서로 죄를 지었다고 우김질하며 사법부의 판단을 기다리고 있다. 문제는 두 진영의 대립으로 우리 사회가 치러야 할 대과가 너무 크다는 것이다. 진보와 보수로 갈라진 두 진영은 연일 군중을 동원하여 거리로 나섰다. 거리 정치의 언어는 피 묻은 칼이나 화약 냄새가 나는 총 같은 말들로 섬뜩하다. 의회 정치가 아스팔트 군중 정치로 만든 것은 우리 정치권이다.

국민의 힘은 원인이 '죄를 지은 야당 대표 지키기'를 위해 '줄 탄핵'과 '줄 일방' 예산 삭감'으로 국정 발목잡기 때문이라 했다. 민주당도 대통령의 '계엄에 따른 내란사태'로 국가가 이 지경에 이르렀다며 서로에게 죄를 씌우며 철천지원수가 싸우듯 한다. 하지만 다수 국민은 알고 있다. 누가 죄를 지은 사람이고 누가 벌을 받아야 하는지를. 죄와 벌은 동일 선상에서 필히 따르는 신상필벌이 원칙인데 정치권은 죄는 가린 채 벌만 주장한다는 것을.

어느 정권이든 국민을 위한 봉사와 의무가 있다. 지금 싸우는 것은 말짱 권력투쟁으로 국민만 희생양이 되고 있다. 이런 행동이 국민께 죄짓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대통령과 여ㆍ야 지도자는 정쟁과 갈등을 부추기고, 중립을 지켜야 할 국회의장은 자당편을 들으며 국회를 운영했다. 정치가 토론과 합의는 실종되고 힘의 논리로 대립하니 그야말로 난장판이다. 거대 야당은 끝없는 입법 폭주와 국회에서 협치 실종으로 국정 시스템을 망가트려 놓았다. 민주당이 집권 시 반대했던 법을 야당이 되니 정략적으로 강행 처리하는 이중적 잣대, 줄 탄핵 29회, 국회 상임위에서 일방 표결한 게 117차례에 달했다. 여ㆍ야당이 의기투합하는 것이라곤 자신들의 세비 올리는 일뿐이다. 이런 국회는 세상에 없다. 이것은 국민으로부터 위임받은 권력을 자신들의 사리사욕을 위해 사용하므로 정치 행위를 넘어선 죄짓는 행위며 마땅히 벌 받아야 한다. 들어 보라! 서민들 죽는다는 소리가 들리지도 않는가.

법을 최종 해석하는 자로 군림한 사법부는 비범한 특권층인가. 죄를 심판해야 할 사법부가 한술 더 뜬다. 대통령을 구속할 때 절차적 정의를 무시하며까지, 법을 다루는 수준이 말이 아니다. 가령 사진 일부를 확대해 제출했다고 '조작'이라며 증거가 될 수 없다는 판단을 하는 판사의 판단은 세 살 어린아이가 들어도 웃을 일이다. 불법 시위 현장에서 경찰관이 피를 흘려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더니 시위 군중이 법원에 난입한 젊은이들은 대거 구속했다. 사람이 먼저지 법원 건물이 중요한가. 명백한 특권의식의 발로이다. 그뿐만 아니다. 헌재의 대통령 계엄 위헌 사건도 진행 과정은 누가 봐도 불공정하게 진행했다. 스스로 비범함을 위세하며 정치 플레이어가 되고 있다.

다시 소설 속으로 돌아가 죄와 벌의 논리에 따르면 비범한 인간 즉 초인은 평범한 인간의 한계를 이미 넘어선 존재이므로 죄인의 본성을 지니고 있다. 오직 자기 자신이 선악의 잣대가 된 사람에게 넘지 못할 선이란 없다. 솔로몬, 마호메트, 나폴레옹 같은 역사 속 영웅이 무고한 피를 흘리면서도 아무런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고 더 목표를 향해 앞으로 나갔던 것은 그들이 그럴 권리를 가지 초인이었기 때문이다.

초인에게는 모든 것이 허용된다, 위험천만한 이 생각은 '신이 없다면 모든 것이 허용된다'로 풀어 말할 수 있겠다. 하늘 무서운 줄 모른다고 하지 않는가. 하늘도 무섭지 않은데 하지 못할 일이 어디 있는가. 나는 비범한 군상들의 초(超)도덕의 오만함에서 악의 본질을 느꼈다. 선악의 경계를 자의적으로 넘나드는 일이야말로 신에 대한 가장 큰 방향이다.

주인공이 품었던 잘못된 생각 (초인론)이 끔찍한 섬모충으로 현현해 분열과 대립의 도가니로 몰아가는 책 내용은 마치 '지금 대한민국' 의 현실을 보여주는 것 같다. 우리 사회의 이 참담한 혼돈과 분열도 죄를 범한 사람의 깨침으로 악몽으로만 스쳐 지나간다면 얼마나 좋을까. 오늘 우리 사회의 이 참담한 혼돈도 깨침을 주는 악몽으로만 스쳐 지나간다면 얼마나 좋을까...

150년도 더 이전에, 위대한 예술가는 이렇게 예언했다. "모두들 공황 상태이고, 서로를 이해하지 못했으며, 저마다 오로지 자신에게만 진리가 있다고 생각하여 (....)누구를 어떻게 재판해야 할지 알지 못했고, 무엇을 악으로 무엇을 선으로 여겨야 할지 의견의 일치를 볼 수가 없었다. 누구를 유죄로 하고 누구를 무죄로 할지 알지 못했다.

사람들은 어떤 무의미한 증오에 사로잡혀 서로 죽여갔다." 한국 사회의 참담한 혼돈과 갈등, 반목이 소설처럼 단지 악몽이었다면 얼마나 좋을까. 문학은 허망해 보여도 새가 울고 개가 짖을 때보다 큰 울림을 줄 때가 있다. 죄지은 사람이 벌을 받는 평범한 진리가 웅승깊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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