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라! 이은화 작가 시 읽기㉟] 팔월

이은화 작가 / 기사승인 : 2025-06-05 11:3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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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월

김정원



할아버지가 대인시장에서 수박을 고르신다
가운뎃손가락으로 수박을 툭툭 두드려 보고
“잘 익었다” 하시고

노점상 널조각 곁에 바짝 쪼그려 앉은
내 머리를 툭툭 두드려 보고는
“아직 멀었다” 하신다



 

▲ 이은화 작가
[일요주간 = 이은화 작가] ( 시 평론 ) ‘내 머리를 툭툭 두드려 보고는/ “아직 멀었다” 하신다’는 할아버지의 말에서 철없고 귀여운 어린 화자의 모습이 그려집니다. 자신의 어림을 해맑게 보여주는 「팔월」의 어린 화자에게서 한해 수박 농사를 망친 미나가 떠오르네요. 이웃집의 권유로 처음 수박 농사를 지은 미나 아버지. 수박밭을 다녀온 뒤 첫 수박을 서리 맞았다며 밖이 시끄럽습니다. 혹여 누가 따갈까 이파리로 가려 놓았다는 수박. 어젯밤까지도 제 자리에 있던 수박이 감쪽같이 사라졌다며 속상해합니다. 아버지의 굳은 표정을 본 미나는 자신이 수박밭을 지키겠다고 결심하지요.

다음날 대못으로 테니스공만 한 수박부터 축구공 크기의 수박에 별을 그리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수박에 꽂힌 못이 붓펜처럼 움직이지 않자 수박마다 깊숙이 못을 찔러 놓습니다. 자기만의 표시를 해두면 범인을 잡을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지요. 넓은 수박밭 표식을 마치고 집에 온 미나는 고단한 잠이 들고 새벽 코피를 흘리지요. 이른 아침 또다시 밖은 소란스럽습니다.

누군가 수박밭에 못질을 해놨다며 아버지의 목소리가 떨렸지요. 잠이 덜 깬 미나는 밖으로 나와 대못을 꺼내 보이며 환하게 웃습니다. 순간 회초리를 내리치는 엄마를 피해 고양이처럼 도망을 칩니다. 자기 행동이 뭔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에 혼란스러웠지요. 이유도 묻지 않고 회초리를 든 엄마가 원망스럽기도 했고요. 대문 밖 맨발로 서성이다 집으로 들어갑니다. “잘난 딸년 땜에 올여름은 수박밭이 파리로 들끓겠네. 저리 미련해서야.” 엄마가 울먹입니다. “…아무려면 수박 농사가 자식보다 더 귀하겠어.” 잠시 후 미나에게 수박밭을 못질하게 된 이유를 들은 아버지의 눈꺼풀이 떨립니다. 아버지는 발에 흙을 털어주며 구멍 난 수박은 다 썩는다고 말하지요. “그럼, 수박을 비닐봉지로 싸 놓을까?” 아버지는 말없이 고개를 젓습니다.

미나는 금방이라도 울음이 터질 것 같아 아빠 품에 안깁니다. 아빠의 땀 냄새가 산딸기 냄새처럼 달았지요. 딸기밭 위로 뜬 무지개를 보면 무지개 뿌리가 있는 곳으로 뛰어가 그 뿌리를 파보리라고 다짐합니다. 무지개 뿌리 속에는 금은보석이 있다고 한 할머니의 말. 금을 파서 수박 농사를 망친 아버지에게 주고 싶다고요. 어린아이의 孝가 보여주는 웃지 못할 일화입니다. 그해 수박밭은 떼 지은 파리의 날갯짓 연주로 여름이 뜨거웠다고 해요. 이후 아버지는 미나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언제 철이 들까, 하고는 웃곤 했다고 합니다.
아버지의 세상에서 자식보다 귀한 것이 또 있을까요. 「팔월」을 통해 어린 시절 추억의 구근球根을 만져 보는 시간, 점자처럼 애틋하게 읽히네요.

 

※ 이은화 서울예술대학 졸업. 시집 『타인과 마리오네트 사이』가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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