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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철원 논설위원 |
[일요주간 = 최철원 논설위원] 지난 5월 22일은 타계한 신경림 시인의 1주기다. 고인이 1972년 첫 시집 농무를 냈을 때는 남의 말을 듣기보다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시인이었다. 그는 산업화가 뿌리내리던 시절 농촌의 절망과 울분을 시어로 토했다. 그 후 평생토록 부조리한 현실의 비판적인 시로 글을 쓰며 개혁을 추구한 문인이다. 시인의 유고 시집인 '살아있는 것은 아름답다' 수록을 펼치다 '미세먼지 뿌연 날' 에 눈길이 멈췄다. "텔레비전을 보고/신문을 읽으면/증오에 찬 구호를 들으며/나는 우울해진다"라는 시행에서 극단적인 우리 정치 현실이 겹쳤기 때문이다.
우리 정치 현실이 처한 위기를 단순한 반복이나 순환으로 보기에는 앞과 뒤가 지나치게 균형이 깨어져 있다. 정치가 다 그르려니 해도 이해를 할 수 없는 부분이 많다. 우리 정치 현장을 보면 주변 환경의 밑바닥은 지극히 난해한 것이라는 사실을 실감한다. 수많은 욕망과 생각의 차이들이 뒤섞여 있는 것이 정치의 현장이다. 무수한 측면과 측면들이 저마다 정의라고 주장하며 우김질하니 점점 판단하기가 어렵다. 이 경우 어느 쪽이 옳고 그르냐는 근본적 문제보다 존중과 타협이 중요하다. 그 어느 때보다 어느 것도 절대 선이라 주장할 수 없고, 절대 악으로 반박될 수도 없는 나름의 사연과 치열함이 현장을 복잡하게 만든다.
계엄 탄핵 대선으로 요동쳤던 정국에 정치가 자정 능력을 잃으면 국민은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가. 근년들어 정치 자정 능력을 위축 또는 상실케 하는 여러 일이 잇달아 벌어지고 있으며 그에 따른 국민은 극단의 편향으로 철저히 양분되었다. 정책보다는 분노를 에너지로 정치를 하는 패거리 집단주의의 어두운 그림자가 사회 전반에 드리워졌다. 문제는 그에 따른 사회적 불안이다. 아무리 훌륭한 제도가 있다 한들 그 제도로 인해 모든 것이 독선 독단의 전체주의로 이어지며 시행착오를 겪은 것을 우리는 역사에서 배웠다.
집단주의는 획일성이라는 시각의 편의성보다는 무책임성, 위험성이 더 크게 내포하고 있다. 그것은 개인을 집단 속에 매몰시키는 것이며, 에리히 프롬이 말한 '그 자유로부터의 도피'로 진행해 갈 수도 있다. 어지러운 시대일수록 집단주의는 무력한 개인에게 유혹적이다. 내가 집단주의 방식에 부정적인 것은 어떤 추상적인 개념이나 미래에 대한 예측에서 비롯된 것만은 아니다. 집단 이기주의의 시각이 은연중에 우리에게 강요하는 결정론과 그 결정론이 현실적으로 우리에게 끼치는 해악이 심대하기 때문이다.
대선 후 나타난 정치 현실은 정국 안정이라는 긍정적 측면도 있다. 그러나 행정, 입법을 가진 민주당의 정치 형태는 야당 시절의 정치 한계를 그대로 답습하여 우려스럽다. 집권당으로 변신한 민주당은 자신들의 가치관 또는 이상주의에 지나친 무게를 두며 마치 그것에 기초한 행동적 개입이 사회의 흐름을 바꾸어놓을 거란 생각으로 정치를 하고 있다. 정치라는 실물은 여러 동기들이 서로 얽혀 들어가기 마련이어서 엄격하게 한 생각만이 작용하는 경우는 드문 일이다. 모든 일의 흐름은 현실 전체가 가지고 있는 그나름의 관성이 있다. 이런 흐름을 무시한 채 매사에 자신들만 올바르다는 헛된 자만심은 전체주의 형태의 집단적인 행동으로 이어지는 지극히 위험함을 내포하고 있다.
국민팔이 하며 국민주권 신처럼 절대 군림하는 집단주의는 내란과 관련된 처리 문제도 철두철미하게 '연역적'인 방식으로 진행하려고 하고 있다. 계엄문제, 경제문제도, 사회문제도 사법 부재 문제, 검찰수사 문제 등 잘못을 모두 국힘당과 윤석렬 전 대통령 탓으로 돌리며, 제도적 결함은 외면하며 청산의 정치를 하고 있다. 우리는 왜 선거를 조기에 치러야 했는지. 과연 그 책임이 윤석열 전 정권에만 있는지, 민주당과 우리 사회 전체는 책임에서 무관하다 할 수 있는가에 의구심이 생긴다. 물론 당시 상황으로 봐서는, 책임이 무겁고 가벼움에 따라서는 어떤 형태든 청산이 진행되어야 한다는 당위도 필요하다. 문제는 일차적 원인 제공자들도 그에 따른 정치적 책임도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다음 한 번쯤 귀납적인 해석에 따른 관련된 모두의 반성이 뒤따라야 한다.
반성은 한 사태의 여러 요인들을 전체적인 틀 속에서 검토하고 재검토하는 사고와 행동의 절차다. 어떤 사태를 일시에 바로 잡을 수 있는 힘이 있다면, 구태여 그런 절차가 필요치 않을 것이다.
올바른 정치는 사회질서의 원리를 하나의 힘의 원천으로 구성해 내려는 것을 의도적으로 자제하는 제도이다. 수많은 요인으로 얽힌 복합체계가 현실인 상황에서 사실적 관찰보다 힘 우위의 편한 정치를 고집한다면 민주주의의 대의 정치는 요원해진다. 가장 바람직한 것은 어떤 사안에 임하여 그것이 구성하거나 표현하고 있는 방법에 대하여 보다 객관적인 판단을 얻어내는 일이다. 이 판단이 반드시 과학적인 명제의 정확성에 가깝다고 생각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성찰에서 나오는 것이기를 기대해볼 수는 있다.
여러 외면적인 발전의 증표 그리고 삶이 나아지는 느린 움직임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가 일찍이 겪을 수 없었던 대변동 속에 있었던 것은 사실이고 그로 인해서 겪는 국민 불안은 피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리고 그러한 변동이 긍정적으로 더욱 나은 사회를 지향하고 있는 것이냐에 대한 의문도 생기게 된다. 변화의 폭과 속도만으로도 사람들은 자기 삶의 터전이 흔들리고 있다는 느낌이 드는 세상에, 힘의 논리로 펼치는 집단주의 정치는 사회문제 해결을 위한 이성적 절차가 생략된 전체주의의 편의성 유혹에서 빠지기가 십상이다.
시인이 타계 여러 해 전 인터뷰에서 했던 말이다. "세상을 바꾸려는 사람 대부분이 자신은 안 바뀌면서 다른 사람만 바꾸려고 한다. 하지만 세상의 변화는 생각이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인정할 것은 인정하는 동시에 그 사람이 지적하는 자신의 잘못을 성찰하는 데서 이뤄진다"고 했다. 시인이 말년에 이르러 쓴 시와 세상에 남긴 말에서 "내 목소리를 내는 것만으로는 세상을 바꿀 수 없다" 했다. 우리 정치에 이보다 더 절실한 말도 없을 것이다.
지난 수십 년간 우리 사회의 정치제도는 여러 형태로 크게 발전하였다. 그러나 지금 시점은 발전과는 정반대의 획일 사회로 가고 있는 느낌이다. 언제쯤 우리 사회가 정치에 휩쓸리지 않고 먹고사는 문제에 조금 더 구체적인 삶의 연관을 느끼게 하는 사회로 돌아가길 기대할 수 있을까. 지금 느낌으로는 그러한 전망이 그렇게 밝은 것 같지는 않다. 이미 어두운 곳으로 첫발을 내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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