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주간=신현호 기자> 반도체공장에서 근무하다 ‘중증재생불량성빈혈’이라는 판정을 받고 9년 째 투병 중인 유명화(29)씨. 그녀는 2차례의 항암 치료를 받았지만 이제 더 이상 치료를 할 수도 없는 상황이다. 몸에서 피가 계속해서 빠져 나가고 있고, 빠져나간 만큼 계속 몸에 피를 집어넣고 있다. 몸 안에는 피 찌꺼기가 쌓여가고 있다. 몸무게는 10kg이나 불었다. 명화씨는 임상시험 중인 철분약을 처방받고 있다. 하지만 이 약이 명화씨의 몸에 맞는 것인지 알 수 없다. 그럼에도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약 처방을 받으며 골수기증자가 나타나기만을 간절하게 기다릴 뿐이다. 골수기증자가 나타나도 3단계의 검사를 모두 통과해야 한다. 지금까지 2차 검사를 통과한 사람은 있었지만 3차까지 통과한 사람은 없었다. 골수검사를 받는 사람에게 수백만 원씩 검사비 명목으로 건네야 하는 데다, 설사 골수 이식을 한다고 해도 생존 확률은 50%다.
<일요주간>은 지난 5월 17일 명화씨의 동생 유명숙(27)씨를 만나 삼성반도체 공장에서 일을 하다가 백혈병을 얻어 투병 중인 언니 명화씨에 대한 자세한 얘기를 들을 수 있었다.
처녀들 모두 병 얻고 퇴사
2000년 7월. 명화씨는 당시 고등학교 3학년이었다. 친구 두 명과 함께 삼성반도체에 입사 했다. 입사한 지 1년이 채 안되어 코피가 나기 시작했다.
명숙씨는 “가족들은 단순 과로 탓으로 생각 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코피가 점점 잦았다. 도무지 멈추지가 않았다. 충남대병원에 가서야 재생불량성빈혈 판정을 받았다”며 “고열이 계속되어 병가를 내고 집과 병원을 오갔다. 병가를 너무 오래낼 수가 없어 복직을 했다. 1주일 만에 상태가 더욱 악화됐다”고 말했다.
명숙씨와 함께 일했던 다른 동료들도 각종 질병으로 회사를 그만뒀다는 게 명숙씨의 설명이다.
“재생불량성빈혈에 중증이 더 붙어서 중증재생불량성빈혈이 됐다. 회사에서는 자동퇴사조치가 내려졌다. (언니와) 함께 일했던 두 친구들 중 한명은 팔에 혹이 생겨서 그만뒀고 다른 한명은 피부발진으로 그만뒀다.” 명숙씨는 “친가 외가를 통틀어 봐도 아픈 사람이 없었다. 모두 건강했다”며 “삼성은 조금이라도 빈혈 기미가 보이는 사람은 채용을 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화학물질에 노출, 12시간 중노동
명화씨는 삼성 반도체 온양공장에서 일했다. 명숙씨에 따르면 언니 명화씨는 반도체 칩을 고온에서 테스트 하는 일을 했다. 명숙씨가 언니로부터 들은 얘기를 정리해보면 이렇다. ‘3조 3교대씩 12시간 맞교대하는 중노동이다. 기계챔버의 뚜껑이 열릴 때 마다 증기가 올라왔다. 얼굴을 만지면 피부발진이 일어나 붉은 뾰루지가 생겼다. 가장 참기 힘든 점은 냄새였다. 갖가지 화학물질에서 역한 냄새가 뿜어져 나왔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구토가 나올 지경이었다. 환기시설도 제대로 없어 숨이 턱 막혔다. 그래도 참아야 했다. 쏟아져 나오는 물량이 키보다 더 높게 쌓여가고 있었다. 이것을 소화해 내기 위해 화장실도 한 번 맘 놓고 못 갔다. 동료들이 불임, 유산, 생리불순에 관한 이야기를 종종 했다. 방광염이 걸린 사람도 있다.’
명화씨도 결국 1년 만에 병원신세를 져야 했다. 정상인의 혈소판 수치는 10만 이상이다. 재생불량성빈혈 판정을 받은 명화씨의 경우 수치가 1만 6000. 병원 측에서는 1만 이하로 떨어져야 의료보험 혜택이 적용된다고 했다. 돈이 많이 들어도 괜찮겠냐는 의사의 말에 명화씨의 가족들은 “사람은 살리고 봐야죠”라며 치료를 시작했다고 한다. 심장부분에 구멍을 뚫어 혈관에 약물치료를 했다. 병원에 치료를 받다 조금 괜찮다 싶어 집에 오면 다시 고열과 미열이 발생했다. 집과 병원을 오가며 통원치료를 받았지만 병이 악화됐고, 결국 명화씨는 병원에 입원해 투병생활을 시작했다.
재직 중엔 ‘가족’ 퇴직 후엔 ‘남’
“언니가 병가를 냈을 때 딱 한 번 동료들이 찾아왔다. 위로금 명목으로 몇 십만 원 걷어서 쥐어주고 갔다. 자동퇴사가 된 이후에는 아무도 찾아오지 않았다. 재직 중에는 가족이고 퇴사 후에는 철저히 남이었다. 더 일찍 알리고 싶었지만 언니가 밝히길 꺼려했다고 한다. 승산 없는 싸움이기 때문이다. 안 그래도 가족들이 경제적, 심리적 고통을 겪는 걸 싫어했다. 더는 가족들에게 부담을 지게하고 싶지 않다고 했다.”
명숙씨는 “9년째 투병생활을 하면서 모든 것이 언니 위주로 돌아갔다. 골수이식비용이 1억~3억 가량 든다”며 “어머니는 그것 때문에 직장이 끝나면 집 근처 고기 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하신다. 맞는 골수를 찾아도 걱정이다. 의사는 운이 좋으면 지금처럼 아픈 채로 평생을 살 수도 있다고 했다. 골수이식을 받아 1~2년 내에 몸이 적응하지 못하면 생존할 가망성이 희박하다. 가족들은 골수기증자가 나타나도 문제라며 걱정을 하고 있다”고 안타까운 심정을 토로했다.
“산재판정을 받으면 치료비가 지원되지만 내겐 그런 게 중요치 않다. 가족들한테 늘 미안하게 생각하는 언니의 부담을 조금이라도 덜어주고 싶을 뿐이다”라는 명숙씨의 말에서 언니에 대한 애처로움이 묻어났다. 1달 후에 산재판정 결과가 나온다. 삼성에 피해보상을 요구할 생각이 있냐고 물었더니 “삼성의 더러운 돈 따위는 받고 싶지 않다”고 했다. 이어 명숙씨는 “아픈 게 언니 탓이냐 아니면 우리 가족 탓이냐 고의든, 실수든 미안하다고 한 마디만 해 달라”며 눈시울을 붉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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