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라! 이은화 작가 시 읽기 76] 고리

이은화 작가 / 기사승인 : 2026-03-30 15:0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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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리

김송포



질긴 인연의 고리를 엮고 살아왔다지
풀려고 안간힘 썼던 시간이 위대해지는 순간 입을 다물었다지
서러운 것을 풀어놓으면 사슬은 녹이 슬어 쇳가루만 남는다지
단단할수록 연의 고리가 길어진다지
엮이기 싫다면서 죽자 살자 엮이려 한다지
소속이 싫다고 떠나더니 혼자선 살아남을 수 없다지

너와 나의 관계는 유효하다
너와 나의 관계는 무효하다

사슬처럼 엮인 우리는 긴 강물이다 강물은 바다로 들어가기 위한 밑밥이다 바다에서 만날 것이다 오래 잘 건너왔다

고리에 날개를 달고 말이지



 


[일요주간 = 이은화 작가] ( 시 감상 ) 인간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고리 안에 놓입니다. 탯줄이라는 고리와 이름이라는 고리 그리고 평생 맺는 관계의 고리들. 우리는 그것을 인연이라 부르며 살아가지요. 시 속의 “사슬”은 억압과 속박의 이미지로 읽히지만 어느 순간 “강물”로 전환됩니다. 이 흐름의 내력은 흘러온 삶이 더 큰 바다로 합류하기 위함이라고 말하지요. 그렇기에 “오래 잘 건너왔다”라는 시인의 문장에는 삶의 파랑을 건너온 안도와 위로가 담겨 있습니다.

「고리」는 관계에 지친 사람을 위한 시입니다. ‘괜찮아, 다 좋아질 거야’라는 희망적 위로라기보다 ‘그래, 그랬지. 그래도 우리 여기까지 왔지’라며 어깨를 쓸어주는 위로처럼요. 그리고 그 긍정의 끝에 날개 달아주지요. 시인은 이렇게 인간이 서로에게 고리가 될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긍정합니다. 풀려는 힘과 엮이는 힘의 윤곽을 잘 드러낸 이 시는 삶이라는 장력에 대해 생각하게 하지요.

가브리엘 마르셀은 인간을 단순히 존재를 소유하는 주체가 아닌 타자의 관계 속에서 참여하는 존재로 이해했지요. 관계의 고리가 그 참여의 형태라면 날개는 그로부터 날아오르는 상승이 아닐까요. 이 시를 읽고 있으면 “~다지”라는 다정한 말에서 마치 시인의 낭독이 들리는 듯합니다. ‘성남FM방송’ 라디오 문학 프로에서 시를 읽어주는 시인의 목소리처럼요. 눈 감고 가만가만 목소리를 따라가면 삶의 물결을 잔잔하게 가라앉히는 바다, 그곳에 고리에 달린 날개를 쓰다듬고 있는 시인의 시가 있습니다.

 

 

※ 이은화 서울예술대학 졸업. 시집 『타인과 마리오네트 사이』가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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