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움이 극에 이르고 고요함이 순일해 질 때 만물의 근원을 보게 된다"

김선국 박사 / 기사승인 : 2018-07-30 15:3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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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리학 박사 김선국의 노자(老子) 이야기(16)

[일요주간=김선국 박사]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가? 매일매일이 생존 경쟁의 연속이요. 세상에서 뒤쳐지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쉴틈없이 일을 해야 한다. 그런 것들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길은 없을까?


◆ 위험하지 않음이여, 不殆


도를 성취한 사람은 그런 위험으로부터 자유롭다고 한다. 그러면 도를 성취한 사람은 어떨까? 노자의 글을 보자.


致虛極 (치허극) 비움(虛)에 도달함이 극에 이르고


守靜篤 (수정독) 고요(靜)를 지킴이 순일해져서


萬物竝作 (만물병작) 만물이 어울려 생겨날 때


吾以觀復 (오이관복) 그 되돌아감을 내가 보니


夫物芸芸 (부물운운) 무릇 만물이 무성하게 자라나나


各復歸其根 (각복귀기근) 각각은 그 뿌리로 다시 돌아감이라.


이 글에서 주어는 노자 자신이다. 이번 화에서는 도에 이르는 과정과 결과를 설명한다. 노자는 비움이 극에 이르고 고요함이 순일해져서 만물의 근원을 보게됨을 설명한다.


만물이 자라서 다시 그 근원으로 오게 되니 그것을 복(復)이라 설명하며 자신이 그 근원으로 돌아옴을 이야기한다.


歸根曰靜 (귀근왈정) 그 뿌리로 돌아감을 고요함(靜)이라 하니


是謂復命 (시위복명) 이것이 명(命)으로 돌아감이고


復命曰常 (복명왈상) 명(命)으로 돌아감을 상(常)이라 하니


知常曰明 (지상왈명) 상(常)을 앎을 명明이라 하네.


지극히 고요해져서 마음이 쉬고 감정이 사라질 때 우리는 그 고요함 가운데 명으로 돌아간다. 명이란 우리의 본성이라 할 수 있다. 본성을 보게 되어 우리의 참된 모습을 이룸을 상이라 하고 그 상을 앎을 명이라 한다. 이 밝음(明)은 노자가 이룬 깨달음의 다른 말이다.


앎을 이룬 상태가 도를 이룬 것이며 이런 상태에 이르면 더 이상 죽음과 삶이 두렵지 않고 이 세상을 완전한 평화와 자유 가운데서 걸을 것이다.


여기서 명은 무엇을 아는 상태가 아니다. 그저 그 상태에 있음이다. 그 존재의 상태에 있어서 주체와 객체가 하나되고 앎과 앎의 대상과 그 작용이 하나되는 상태가 바로 명, 밝음 그 자체인 것이다.


不知常 (부지상) 상을 알지 못하면


妄作凶 (망작흉) 망령되이 흉함을 지어내니


知常容 (지상용) 상을 알면 포용하게 되어서


容乃公 (용내공) 포용은 공평함에 이르고


公乃王 (공내왕) 공평함은 왕도에 이르며


王乃天 (왕내천) 왕도는 천도에 닿아서


天乃道 (천내도) 천도가 도에 닿음이라.


道乃久 (도내구) 이 도는 영원하여서


沒身不殆 (몰신불태) 죽는 날까지 두려움이 없어라.


우리의 참 모습을 알지 못하면 결국에는 망령된 것에 빠지게 된다. 우리의 참된 본성을 알게 되면 모든 것을 포용하고 공평무사하게 되어서 왕도와 천도를 이해하고 궁극의 도에 이르게 되며 우리가 바로 그 영원함과 하나가 되니 죽는 날까지 두려움이 없다.


무한한 평화와 궁극의 실상을 성취한 존재는 삶과 죽음을 초월한다. 영원을 넘어서 시간조차 없는 그 세계와 하나 되는 것이 가르침을 배우는 제자들의 마지막 목표일 것이다.


헝가리의 부다페스트에 있는 철학의 정원에는 예수, 부처, 노자, 아브라함이 중심을 보고 있는 조각상이 있다. 이런 위대한 인물들은 우리에게 인간 존재의 본질에 대한 해답을 주었다. 위대한 성인들의 가르침의 핵심은 ‘나는 무엇인가?’에 대한 것이다.


노자는 그에 대한 해답을 제시하고 있다. 그 해답은 독자들 스스로 고민해서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야 할 것이며, 이는 결국 우리가 일생에 걸쳐서 해결할 유일한 문제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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