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담자: 허향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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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허향숙 시인 |
허향숙 시인. 충남 당진 출생. 2018년 계간지 《시작》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2021년 첫 시집 『그리움의 총량』(시작시인선)을 출간, 3쇄를 기록하는 등 독자들의 큰 사랑을 받았으며, 2024년 두 번째 시집 『오랜 미래에서 너를 만나고』(시작 시인선)와 전자 소시집 『슬픔은 늙지 않는다』를 상재했다. 2026년 4월 말, 상실의 고통을 생명의 옹이로 치환한 세 번째 시집 『울음이 자라는 것을 보고 말았다』(솔 시선)를 출간했다.
Q. 2018년 등단 이후 쉼 없이 시의 길을 걸어오셨습니다. 시인 허향숙에게 ‘시를 쓴다는 것’은 어떤 실존적 의미를 지닙니까?
▶ 저에게 시는 ‘상처라는 씨실과 구원이라는 날실’로 직조되는 고해성사와 같습니다. 시업(詩業)의 길에 들어선 것은 단순한 문학적 열망이 아니라, 삶이 내던진 가혹한 질문들에 답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금지옥엽 키운 딸을 먼저 보내고, 그 참담한 그리움 끝에 암이라는 병마와 사투를 벌여야 했던 극한의 시간들.
시는 저를 살린 유일한 숨구멍이었습니다. 고통을 미화하기보다 그 고통의 정면을 응시하며 언어라는 비명으로 기록해 왔습니다. 제 시의 행간에는 살기 위해 하늘을 우러러 토해낸 가장 간절한 기도가 배어 있습니다.
Q. 시인이면서 동시에 시낭송가로도 활동하고 계십니다. 시를 창작하는 것과 낭송을 통해 발화하는 것 사이에는 어떤 문학적 긴장감이 존재하는지요.
▶ 시낭송은 활자로 박제된 시에 시인의 숨결을 불어넣어 다시 살려내는 ‘부활 의식’입니다. 당연히 그 부활의 몸체인 ‘시’가 본질입니다. 낭송은 시의 정서적 결을 완성하는 마지막 과정이지요. 문장의 숨 하나까지 정교하게 다듬는 일은, 내 안의 슬픔을 정성스럽게 갈무리하는 수행과도 같습니다. 목소리는 시가 세상으로 나아가는 길일 뿐, 그 길 위를 걷는 본질은 오직 시인의 진실한 고백에 있습니다. 낭송의 화려함보다 시어 한마디에 담긴 시인의 심장 소리를 먼저 헤아리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Q. 2017년 한 해에만 30여 회를 수상하셨습니다. 낭송 준비는 어떻게 하시는지요?
▶ 비결이 있다면 기술이 아닌 ‘기다림’과 ‘정성’에 있습니다. 저는 시를 억지로 외우려 하지 않습니다. 대신 시의 곁에 가만히 앉아 시가 제게 마음을 열어줄 때까지 묵묵히 기다려줍니다. 대부분의 시는 아프기 마련입니다. 그 시어의 상처를 제 몸에 이식하고, 단음과 장음을 엄격히 구별하며 문장이 내는 소리의 결을 정교하게 다듬습니다. 천 번의 낭독을 거쳐 시인의 고통이 제 맥박과 일치될 때 비로소 무대 위에 오릅니다. 낭송은 시인이 건네는 보이지 않는 손을 잡고 독자에게 연결해 주는 중재자와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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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 상설무대에서의 시낭송 공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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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양평시낭송협회 특강 중. |
Q. 첫 시집 『그리움의 총량』과 두 번째 시집 『오랜 미래에서 너를 만나고』는 제목만으로도 서로 다른 시간의 결을 품고 있습니다. 두 시집의 차이를 설명해 주신다면요.
▶ 첫 시집 『그리움의 총량』이 상실이라는 중력에 붙들린 ‘과거의 시간’을 견디는 기록이었다면, 두 번째 시집 『오랜 미래에서 너를 만나고』는 그 중력을 이겨내고 존재의 지평을 확장해 나가는 ‘초월의 서사’입니다. 첫 시집은 주어진 고통의 무게를 낱낱이 재어보며 비극에 질서를 부여하는 인내의 과정이었습니다. 반면, 두 번째 시집은 하이데거가 말한 ‘도래할 시간’을 향해 열려 있습니다. 과거의 상처가 미래의 나를 완성하는 필연적 인연임을 깨닫고, 현재의 고통을 미래의 구원과 연결하는 시적 도약을 시도했습니다.
Q. 전자 소시집 『슬픔은 늙지 않는다』라는 제목이 묵직하게 울립니다. 이 제목에 담긴 특별한 의미가 있는지요.
▶ 인간의 본질적인 슬픔은 풍화되지도 노쇠하지도 않는 ‘영원한 현재’와 같습니다. 십 년 전의 상실이 오늘 아침의 이슬처럼 여전히 서늘하게 심장을 파고드는 것은, 슬픔이 변하지 않는 본질을 지녔기 때문입니다. 제게 있어 세상의 모든 슬픔은 제게 닥친 거대한 슬픔, 그날에 머물러 있습니다. 저는 늙고 있는데 슬픔은 여전히 생생하지요. 그 생생한 아픔을 부정하지 않고 슬픔과 동행하며 삶의 깊이를 더해가는 이의 품격을 담고 싶었습니다.
Q. 일상에서 시의 언어를 어떻게 길어 올리시나요? 어떤 순간, 어떤 장소에서 시의 첫 행이 찾아오는지 듣고 싶습니다.
▶ 저에게 산책은 존재의 근원을 향한 ‘매일의 순례’입니다. 매일 오르는 불암산과 중랑천의 물길은 끊임없이 만물을 생성해 내는 생명력과 마주하는 장소입니다. 텃밭에서 풀을 뽑다 마주한 「신의 꽃」 일화처럼, 시의 첫 행은 자아를 내려놓고 만물의 목소리에 귀 기울일 때 섬광처럼 찾아옵니다. 주체와 객체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물아일체(物我一體)’의 순간, 자연은 저에게 시라는 이름의 신탁을 건네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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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노작문학관에서 진행된 ‘김용택ㆍ이재무 시인과 함께 걷는 시숲길’행사에서. 좌 아래부터 시계 반대 방향으로 이재무시인, 김용택 시인, 손택수(노작문학관관장)시인, 허향숙 시인. |
Q. 이번 4월 말에 출간된 세 번째 시집 『울음이 자라는 것을 보고 말았다』라는 제목부터 예사롭지 않습니다. 표제시를 통해 ‘울음’이라는 무형의 감정을 어떻게 생명력 있는 존재로 형상화하셨는지요.
▶ 보통 울음은 터져 나오고 사라지는 소멸의 정서로 여겨지지만, 제게 울음은 내면에서 뿌리를 내리고 자라나는 ‘생명체’입니다. 상실의 고통은 제 안에서 눈물로 고여 사라지지 않고, 제 삶의 수분을 빨아들이며 묵묵히 자라났습니다. 표제시 『울음이 자라는 것을 보고 말았다』는 그 고통의 성장을 정면으로 목격한 이의 기록입니다. 울음이 자라나 단단한 삶의 옹이가 되고, 그 옹이가 결국 저를 지탱하는 힘이 되는 역설을 담았습니다. 비극을 회피하는 것이 아니라, 울음을 정성껏 키워내어 생의 비료로 삼겠다는 시인으로서의 의지를 담은 시입니다.
Q. 두 번째 시집 『오랜 미래에서 너를 만나고』를 출간한 이후, 문태준 시인이 《불교신문》을 통해 시인님의 시 「피고지는 일」을 소개하며 깊은 주목을 한 바 있습니다. 한국 문단의 중견 시인이 시인님의 작품 세계를 조명한 것에 대한 소회와, 해당 시에 담긴 사유가 궁금합니다.
▶ 문태준 시인께서 제 시 「피고 지는 일」의 행간에 머물러 주신 것은, 까마득한 후배 시인에게 건네는 따뜻한 관조(觀照)이자 언어를 매개로 한 은혜로운 법연(法緣)입니다. 먼저 그 시를 다시 한번 읊어봅니다.
피고 지는 일
피고 지는 일은
어둠의 몫
태양은 늘 처음 자리에서 빛나고
어둠 혼자 피고 진다
지금 캄캄하다 하여 울지 말자
머지않아 어둠은 질 것이고
사위 환해지리니
보통 우리의 인식은 ‘어둠’이라는 바탕 위에 태양이 뜨고 진다고 믿습니다. 하지만 가슴속에 씻기지 않는 슬픔을 안고 살아야 했던 저에게, 어둠이 본질이고 빛이 현상이라는 논리는 너무도 가혹했습니다. 숨을 쉬기 위해, 살기 위해 저는 인식의 전도를 꾀해야만 했습니다. 존재의 근원은 결코 꺼지지 않는 ‘빛’이며, 우리를 괴롭히는 슬픔과 고통이라는 ‘어둠’이야말로 잠시 피었다 지는 찰나의 현상이라고 말입니다.
이 시는 불교의 ‘진공묘유(眞空妙有)’와 맞닿아 있습니다. 텅 비어 있는 듯하나 신령스러운 광명으로 가득 찬 태양은 우리 내면의 불성(佛性)처럼 불변하는 본질입니다. 반면, 우리를 울게 하는 어둠은 인연에 따라 잠시 피고 지는 객관적 상관물일 뿐입니다. 내가 어둠 속에 갇힌 것이 아니라, 어둠이라는 손님이 내 안의 빛의 마당에 잠시 머물다 가는 것이라 여길 때, 절망의 강을 건널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깨달음을 얻은 후에야 저는 비로소 어떠한 걸림도 없는 상태, 즉 ‘무애(無碍)를 사는 일’에 도달할 수 있었습니다.
지방(紙榜) 위에 쓴 글씨가 타버려도 종이의 본질은 남듯, 슬픔이 나를 태워도 내 안의 근원적인 빛은 훼손되지 않습니다. 이 시를 통해 제가 독자들과 나누고 싶었던 것은 바로 이 ‘비워냄의 미학’입니다. 지금 캄캄한 터널을 지나는 분들이 있다면, 그것은 당신이 어둠이라서가 아니라 단지 어둠이 당신의 곁에서 잠시 피고 지는 과정임을, 그리하여 결국 사위는 다시 환해질 것임을 시라는 이름의 죽비로 전하고 싶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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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작문학상 시상식’ 이형권 평론가, 허향숙 시인, 홍용희 평론가, 김재홍 수상자(시인⦁평론가) |
Q. 시인님의 시학(詩學)을 논할 때 「신의 꽃」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잡초’를 ‘신의 꽃’으로 명명하며 존재의 가치를 재발견하게 된 계기는 무엇입니까.
▶ 텃밭에서 매일 돋아나는 풀을 뽑다 문득 "당신들이 잡초라 부르는 나도 신께서 이 땅에 보낸 꽃이다"라는 환청 같은 항변을 들었습니다. 이름이 없다고 해서, 혹은 원치 않는 곳에 피었다고 해서 생명의 가치가 폄하될 수는 없습니다. 세상의 기준으로는 보도블록 틈에 낀 보잘것없다 여겨지는 잡초일지라도, 신의 섭리 안에서는 저마다의 우주를 품은 진귀한 ‘신의 꽃’입니다. 이 시를 읽고 자신의 삶이 존중받았다는 느낌에 30분간 오열했다는 독자의 전화를 받았을 때, 시가 누군가의 닫힌 마음을 여는 가장 부드러운 열쇠임을 확신했습니다.
저의 시학은 이렇듯 소외된 존재들에게 이름을 붙여주는 ‘존재의 명명’에서 출발합니다.
Q. 앞으로의 계획과 《일요주간》 독자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씀 부탁드립니다.
▶ 신작 시집의 여운을 갈무리하며, 다음 시업(詩業)을 향한 사유의 시간을 갖고 싶습니다. 또한 시의 형식을 확장하여 조금 더 다채로운 언어의 무늬를 그리려 합니다. 제 삶의 굽이마다 새겨진 사유를 엮은 산문집, 잃어버린 동심의 원형을 찾는 동시집, 그리고 찰나의 이미지를 시적 언어로 포착하는 디카시집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이는 시와 시 아닌 것의 경계를 허물고, 우리 삶의 모든 순간이 결국은 시에 도달하게 되리라는 명제를 푸는 과정이 될 것입니다.
“꽃은 자신이 꽃인 줄도 모른다. 나도 그렇게 시를 피우고 싶다”는 제 에세이의 문장처럼, 인위적인 욕망을 내려놓고 자연의 순리대로 시를 빚어내겠습니다. 독자 여러분 또한 각자의 자리에서 피어난 단 하나뿐인 ‘신의 꽃’입니다. 4월 말에 세상에 나온 저의 울음이 여러분의 삶에 촘촘한 위안이 되길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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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은화 시인 |
* 이은화 서울예술대학 졸업. 시집 『타인과 마리오네트 사이』가 있음. 일요주간 문화예술 전문 주필위원.
일요주간 / 이은화 작가 cactus6812@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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