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같은 바다, 다른 선택… 북해 유전이 한국에 남긴 경고

박덕수 칼럼니스트 / 기사승인 : 2026-09-11 11:3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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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초, 북해 밑바닥에서 검은 기름이 솟구쳤을 때 영국과 노르웨이는 같은 출발선에 서 있었다. 하늘이 내려준 오일머니, 국가 단위의 로또였다.

반세기가 지난 지금 두 나라의 풍경은 완전히 갈라섰다. 노르웨이는 세계에서 손꼽히는 부유한 복지국가가 됐고, 영국은 제조업이 무너지고 빈곤이 만연한 나라가 됐다. 같은 바다, 같은 자원인데 왜 이렇게 갈렸을까. 답은 간단하다. 한쪽은 참았고, 한쪽은 써버렸다.

● 원금에 손대지 않은 나라

노르웨이는 기름이 언젠가 마른다는 걸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1990년 법을 만들고 1996년 첫 적립을 시작한 정부연금펀드(GPFG)는 북해 수익 전액을 해외 자산에 분산 투자했다. 2025년 말 기준 자산 규모는 약 2조 2,000억 달러, 원화로 2,900조 원. 국민 한 사람 앞에 5억 4,000만 원씩 돌아가는 셈이다(노르웨이 중앙은행 투자관리청 NBIM, 2025 Annual Report).


여기에 '3% 재정준칙(Handlingsregelen)'이라는 빗장까지 걸었다. 펀드 원금은 건드리지 않고, 연간 기대 실질수익률 3% 안에서만 재정에 쓴다는 원칙이다. 표가 급한 정치인도 넘볼 수 없는 선을 법으로 그어놓은 것이다. 덕분에 통화 급등과 물가 폭등이 제조업을 갉아먹는 '네덜란드병'을 피했고, 해양 플랜트와 첨단 엔지니어링 생태계도 그대로 지켜냈다.

오늘 다 쓴 나라

1980년대 대처 정부는 정반대로 갔다. 북해에서 걷은 누적 1,660억 파운드 넘는 세수를 기금으로 묶지 않고 그대로 일반 회계로 흘려보냈다(영국 IPPR 북해 유전 보고서). 미래 산업이나 기술 인프라 대신 고소득층 감세, 그리고 광산과 공장이 문을 닫으며 쏟아진 실업자를 달래는 선심성 수당에 썼다. 딱 거기까지였다.

대가는 참혹했다. 1970년대 GDP의 25%를 차지하던 제조업 비중은 2025년 9%대로 주저앉았다(World Bank). 기름이 마르자 남은 건 텅 빈 국고와 녹슨 공장터였다. 지금 영국에서는 1,420만 명, 인구의 5분의 1이 상대적 빈곤선 아래 살고 그중 어린이가 450만 명이다(JRF, UK Poverty 2026). 최대 구호단체 트러셀이 2024~2025년 한 해 나눠준 긴급 식량 꾸러미만 290만 개, NHS 진료 대기 환자는 617만 명이다.

남 일이 아니다

이 이야기가 불편한 건, 지금 우리 모습이 쇠락 직전 영국과 소름 끼치도록 닮아서다. 어떤 면에선 더 위태롭다. 영국은 그래도 산업이 여럿이었다. 우리는 사실상 하나의 엔진에 나라 전체를 걸고 있다. 4차 산업혁명의 본질은 AI로의 전환, AX다. 모든 산업 구조가 재편되는 이 전쟁터에서 대한민국의 곳간을 거의 혼자 떠받치는 건 반도체다. 전체 수출에서 반도체 비중은 20%대를 오가다 AI 서버 수요가 폭증한 2024~2025년엔 30%에 육박했고, 2026년 7월 초 HBM 수요 급증으로 40.3%까지 치솟았다. 세수도 외화도 지금은 사실상 반도체 하나가 지탱한다.

문제는 이 마지막 엔진조차 앞으로 10년을 장담할 수 없다는 점이다. 미국은 보조금으로 자국 생산을 밀어붙이고, 중국은 국가 총력전으로 추격하고, 대만·일본은 동맹을 무기로 공급망을 다시 짠다. 북해의 기름이 언젠가 마르듯 반도체 초격차도 영원한 자산이 아니다.

그런데 우리 정치는 무엇을 하고 있나. 선거철만 되면 현금성 지원금이 뿌려지고 경제성 검증도 없는 수십조 원짜리 지역 토목 공약이 쏟아진다. 국가채무는 이미 1,200조 원을 넘었고 가계부채는 1,900조 원에 육박한다. 합계출산율 0.7명대, 세금을 짊어질 청년은 줄어드는데 2055년이면 국민연금이 바닥난다는 계산서는 이미 우리 손에 쥐어져 있다(보건복지부 제5차 국민연금 재정추계).

영국이 오일머니를 나눠 쓰고 제조업을 잃었다면, 우리는 반도체 세수를 나눠 쓰고 하드웨어 엔지니어링 생태계 전체를 잃을 위기에 서 있다.

어느 쪽으로 갈 것인가

290만 개의 긴급 식량 꾸러미, 617만 명의 진료 대기 환자. 기름이 마른 뒤 영국에 남은 성적표다. 교훈은 명확하다. 성장이 멈춘 자리에서 미래를 위한 자본 축적 없이 뿌려지는 선심성 복지와 포퓰리즘은 나라 전체를 서서히 가라앉히는 독이 된다.

지금 지켜야 할 건 금융·부동산 거품이 만드는 착시나 한 번의 현금 살포가 아니다. 반도체 하나에 매달린 단일 엔진 경제를 넘어, 배터리·바이오·로봇·방산·SMR·첨단 엔지니어링이라는 다중 엔진으로 AX 전쟁을 치를 실물 제조업 생태계와 하드웨어 기술 주권을 지켜내는 일이다. 그리고 반도체가 벌어들이는 막대한 세수를 영국처럼 일반 회계에서 탕진하지 말고, 노르웨이처럼 독립성과 자산화 원칙 위에서 미래 세대를 위한 영구 자본으로 묶어두는 일이다.

이 일은 정치인 몇 사람의 결단만으로 되지 않는다. 표를 좇는 정치는 스스로 멈추지 않는다. 정치인이 당장의 표 대신 나라의 미래를 셈하게 만드는 건 결국 유권자의 몫이다. 선심성 공약에 박수 치는 대신 그 청구서가 내 아이 세대로 갈 것을 묻는 국민이 늘어날 때, 비로소 정치도 각성한다.

노르웨이는 원칙을 지켜 미래를 샀고, 영국은 표를 사려다 미래를 팔았다. 반도체라는 마지막 로또가 AI 전쟁터의 소모품이 되어버리기 전에 — 정치는 각성하고, 국민은 깨어나야 한다. 말이 아니라 원칙으로, 원칙이 아니라 실행으로.

 

 

일요주간 / 박덕수 칼럼니스트 happyworld535@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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